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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함의 기호학

 윤기언의 ‘제스추어gesture’ 전은 손이 취할 수 있는 여러 자세를 통해 다양한 상징을 끌어낸다. 이번 전시에 나온 십여 점 넘는 작품들에 모두 손이 들어간다. 소재의 유형화를 피하고 늘 새로 보는 것처럼 그리기 위해 그는 자신의 실제 손을 모델로 한다. 왼손이 모델이 되고, 오른손으로 그리는 식이다. 편의를 위해 간혹 거울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사진이나 영상은 활용하지 않는다. 직립보행을 통해 대지로부터 손이 자유로워진 이래, 인간의 손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의 작품에는 방향 지시, 의사전달, 숫자 세기 등 손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소통의 형태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림 연습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손의 모양이 야기하는 여러 느낌에 매료되어 주목하기 시작했다. 손은 다른 형상들과 중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손 자체만 부각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손들이 모여들어서 다른 형상으로 변모하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한 형태의 손이 반복되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손의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관객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는 다가와서 봐야 하는 동양화의 특성을 강조한다.

 작품 [012345...]는 층층이 색조의 변화를 가지는 8줄x6열의 손들이 있는 작품으로, 손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손 형태의 다양한 조합의 가능성으로 인간은 손만으로도 가능한 의사소통의 방식을 개발해 왔는데, 가령 수화나 군대 같은 특수한 집단에서 통용되는 수신호 같은 것이 그 경우이다. 이 작품에서 손의 자세는 워낙 다양해서 특정한 수화의 기호도 포함될 수 있지만 완전히 겹쳐지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조형적인 관심은 소통까지도 포함하는 더 넓은 범위의 것이다. 작품 [메아리]는 꼭 쥐고 있는 같은 손의 모습이 가로로 길게 펼쳐지면서, 흐릿함과 진함을 교차시킨다. 형태의 선적인 배열은 메아리처럼 동시적 울림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정확한 메시지를 지향하는 선적인 흐름을 교란하고, 도열한 이미지들을 심미적인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손이 가질 수 있는 소통의 변주는 얼굴을 나란히 배열한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손은 보다 직접적인 인간의 표정이나 행동을 연상시킨다. 작품 [손을 씻자]는 신종플루를 예방하기 위한 ‘범국민 손 씻기 운동본부’의 홍보물을 따라서, 손을 닦는 6단계에 남녀가 접촉하는 모습과 병치시킨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병치를 통해서 접촉에 대한 공포를 계몽하는 예방의학적인 관점을 변조한다.

 불순한 접촉이 행해지는 오른쪽 화면을 본 후 왼쪽의 손 씻는 모습을 다시 보면, 두 손이 비벼지는 여러 자세가 단순히 어떤 기능 수행이 아닌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한 범주의 경계를 내부로부터 전복시킨다. 윤기언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항이 반대의 것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가령 작품 [나는 너다]에서 화면에 그려진 ‘꽃손’이라는 단어가 서로 잡고 있는 손의 형태로 꽃을, 꽃(국화)으로는 손을 채워 넣었다. 가위 안에 주먹을, 보자기 안에 가위 등을 채워 넣은 작품, 왼쪽을 향해 있으나 안의 손들은 오른쪽을 향한 작품 등은 동일한 몸체를 이루는 이질적 타자들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약속된 게임의 원칙이나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는 특정한 지시기능은 그 내부를 채우는 이질적 힘들에 의해 무력화된다. 선으로 다양한 손의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 [어디로]는 한쪽 방향을 향한 손들이 화면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바탕이 안 보이는데, 여기에서 그는 일러스트같은 명료함 속에 존재하는 혼돈, 즉 방향상실과 불명료함을 표현한다. 윤기언은 2008년에 작성된 작가노트에서 ‘미시의 세계와 거시의 세계, 아름다움과 추함, 옳은 것과 그릇 것 등이 실제로 서로 다르지 않음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작품 [손짓]은 열두 가지 손짓에 해당되는 얼굴표정을 매치시켰다. 머리털과 목이 생략된 채 안면만 남아 있는 얼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표정읽기에 집중하게 한다. 통일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다양하고 재미있는 표정을 가지는 그것들은 마치 이모티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윤기언의 작품 속에 내재된 기호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가령 쫙 핀 손은 편안한 얼굴, 주먹 쥔 손은 뭔가 결심하는 표정, 눕힌 손은 편안하게 누운 얼굴, 엄지를 내민 손은 새초롬한 모습 등이 연상된다. 그는 손에서 표정을 읽는다. 손은 표정을 넘어 사물의 윤곽과 공간을 채우기도 한다. 바라쿠다barrcuda 시리즈는 12지지地支동물에서 한 개체의 특징과 표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머리 정면을 작은 손들과 중첩시킨 것이다. 바라쿠다는 군집을 이루는 열대 지방 물고기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완결되어있는 조형단위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이루는 윤기언의 작품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단어이다. 군집형상을 이루는 바라쿠다 시리즈는 관객이 보는 거리에 따라서 작품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작품 [바라쿠다-개]는 손 모양으로 개머리 실루엣을 만들고, 어두운 바탕에는 다양한 손의 포즈가 떠돈다. 조형적 요소가 모여서 형태를 이루는 과정이 동적인 구조로 표현된다.

 또 다른 [바라쿠다-개]는 바깥으로 향하는 손들이 뭉친 털처럼 보인다. 동물의 특징에 따라서 색과 손의 배열은 달라진다. 가령 [바라쿠다-돼지]는 손만으로 이루어진 살의 느낌이  살려 있고, [바라쿠다-소]는 황소 색깔로 손의 흐름을 표현했다. [바라쿠다-토끼]에서 토끼의 귀 부분은 사람들이 소리를 듣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바라쿠다 시리즈에서 절정을 이룬 군집형상은 2000년대 후반의 그의 작품 경향이다. 2007년의 ‘숨은 그림 찾기’ 전(갤러리 도스)전이나 ‘동그라미’ 전(갤러리 가이아)에서 염주 알처럼 꿰어진 구슬이 다양한 얼굴이 되는 작품은, 대중사회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바와 같은 군집적 생태계를 표현한다. 손에서 얼굴표정을 읽는 등, 형태나 의미의 연상관계를 통해 이미지를 확장하거나 중첩시키는 윤기언의 방식은 유추적이다. 유추의 방법론은 이번 전시에 포함은 안 되어 있지만, 호랑이와 지도형상, 그리고 산수화를 중첩시킨 작품에서 전형적이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호랑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산수인 작품으로, 의미나 형태적 유사성을 매개로 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유사의 사고방식은 근대 이전의 관념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말과 사물]에서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사성resemblance은 서구문화에서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사물들은 유사의 관계에 의해 사슬처럼 연결된다.

 푸코에 의하면 자연물들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을 상호 밀착시키면서도 서로 독립적이 되게 했던 유사관계의 체계를 밝히는 것이다. 이 때 이 기호들은 유사물의 활동에 지나지 않으므로 유사한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한하고도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임무가 된다. 윤기언의 2007년의 전시작품에서 군집형태로 이합집산 하는 인간들은 유비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으로, 유비에 의해 존재들은 대 연쇄를 이루고 있다. 존재의 대연쇄는 자연이라는 대우주와 인간이라는 소우주를 유비analogy하는 생각에서 전형적이다. 유비를 통한 연관관계는 자연에서 유래한 상징적 사고를 공유하는 동양적 사고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다. 윤기언의 작품은 두 개의 구별되는 요소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와 닮음의 관계를 최대한 활용한다. 이러한 유비의 과정은 끝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 )는 [해석의 한계]에서 유추에 의한 추론의 유형은 무한한 연상의 얽힘 속에서 의미의 계속적인 변화를 통해 표류한다고 말한다. 모든 의미표현은 다른 의미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이 과정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 윤기언의 작품 속의 형상은 안정되지 않고 다른 유사함을 끊임없이 지시하면서 무한한 표류의 무대로 펼쳐지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형상을 이루는 손들은 그 바깥의 궤도를 돌면서 또 다른 형상으로 변모할 준비를 하곤 한다. 하나의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하나의 의미에서 또 다른 의미로 미끄러지는 과정은 정착이 아닌 표류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연쇄한 무한히 계속되면 궁극적인 의미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기호의 소통적 측면은 약화된다. 대신에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다층적으로 상징체계라는 측면이 강화된다. 이러한 점에서 상징주의를 구사하는 예술작품은 종교나 신화의 사고방식과 닿아있다. 바라쿠다 시리즈에서 12지상을 가득 채우는 인간의 신체 부위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내포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가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밝힌 바 있듯이, 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자아는 세계에 대하여 둘러싸이는 동시에 둘러싸는 존재가 된다. 르네상스의 인간이 신과 무한한 우주에 대해 감싸면서 감싸이는 관계를 취하고 있듯이, 윤기언의 변형된 12지상은 인간의 표정을 지닌 손이 그 형태들을 결정한다. 유사에 의한 중첩에서 대상은 그자체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물이 된다. 그것은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결합되는 융합의 과정이다.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가지는 손들을 자연을 묶는 상징적인 끈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이 상징적 끈은 다소간 유연하다.

 그것은 역사상에 존재해 왔던 종교나 신화적 사고가 존재의 대 연쇄 망이 도달해야만 하는 궁극적인 중심이 확실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그것은 엄격한 인과관계나 법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가령 윤기언의 작품에서 다양한 손의 표정은 소통의 방식이지만, 그것은 엄격하게 정해진 언어체계, 가령 수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손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인해 기호적 성격을 가진다. 특히 그것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 체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손은 선적으로 흐르면서도 집적을 통해서 또 하나의 광경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통시적이면서 공시적인 성격을 가지는 언어의 특성을 공유한다. 그의 작품에서 손이라는 표시는 원숭이나 용의 얼굴을 대신 표현하며, 호랑이는 지도나 산수가 된다. 이러한 것들은 대상을 모방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윤기언의 작품에서 말과 사물, 인간은 서로를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이 상징적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은 기존의 상징체계를 인용하며 이를 새롭게 각색한다. 상징은 특정한 대상과 더불어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인간은 늘 이 상징적 우주 속에 살아왔는데, 공유된 상징체계가 점점 와해되면서 대표적인 상징형식이기도 했던 예술 역시 신화나 종교, 언어와 같은 보편적인 관념체계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리는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되었지만, 예술의 뿌리를 잘라낼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현대는 상품형식으로 포장된, 코드화된 기호체계로 이루어진 사이비 우주를 벗어나면, 즉물적인 현실 그 자체가 험악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푸코는 근대에 와서 유비적 사고가 해체되면서 언어와 세계의 깊고 가까운 관계는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사물과 단어는 서로 분리되었고, 그러므로 눈은 보는 것으로, 오직 보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귀는 듣는 것으로, 오직 듣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그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없다. 그것은 또 다른 융합을 위한 단계로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전문화와 분업을 위해 모든 것을 파편화시켰던 근대를 통과하면서, 융합은 예술가들 뿐 아니라 첨단을 추구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지향하는 바가 되었다. 다소간 고풍스럽게 보이는 윤기언의 작품은 형식화되고 자율화된 제 언어에서 새로운 의미의 그물망을 짜기 위해 실험하는 현대의 문화적 생태계에 속해 있다.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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