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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열망, 열망의 추락
 
서울은 망각의 장소다.
망각하는 곳이자 망각되는 곳이다. 어제 당당하게 서 있던 집은 오늘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고, 나란한 집들 사이에서 숨 쉬던 골목조차 흔적도 없이 사멸되기도 한다. 도시인의 과거로의 여정은 뻔뻔하리 빽빽하게 들어선 무심하고 무자비한 콘크리트 벽에 부딪히기 일쑤이다. 어린 시절 자랐던 집이나 기억 속에 아련히 아른거리는 곳을 찾아갔다가는 낯선 아파트나 멀티플렉스 극장이 들어선 대형 상가 앞에서 망연자실하기 쉽상이다. 하루 단위로 바뀌어 가는 도시 공간에서 그나마 과거에 대한 아주 작은 즉물적 단서라도 찾아낸다면 행운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가장 중요시 여겨지던 건축물이 통째로 불에 타서 소멸하는 판에, 사적인 추억은 미소보다 왜소해진다. 사치처럼 유치해진다. 장소가 사라진 구멍에는 또 다른 건축물이 들어서지만 그것은 빈자리를 메우지는 않는다. 신체부위가 잘려나간 자리처럼 망연한 흔적은 필멸하는 시간의 진리를 아프게 일깨운다. 그리하여 기억과 소멸 사이에서 시선은 격렬하게 진동한다. 황홀한 발작처럼. 고향을 잃은 군중 속의 나는 과거의 절대적 부재 앞에서 미래의 죽음을 예감한다.
<집-기억>전의 출발점은 철거 직전의 빈 집이었다.
도시 행정에 밀려 급하게 빠져나간 삶의 찌꺼기들이었다. 사람의 숨소리가 그치면서 이미 폐허로 전락한 공간이었다. 한 때는 애착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지라도 언제부턴가 사양의 길에 접어든, 삶의 사소하고 미세한 미장센이다. 낡은 가구 나부랭이나 쓸모가 없어진 물건들, 미처 이삿짐 속에 묻히지 못한 잉여의 것들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해 빠진 물체들이리라. 너무나 평범하여 창작행위의 소재가 될 만한 여지도 없다. "아카이브의 열망"을 자극하기에도 못 미치는 미천한 것들이다. 그들은 집으로부터 가정의 질서로부터 추방당하는 대신 추방당하는 자들을 따라 미처 추방당하지 못한 채 남겨졌다. 충실한 개처럼 꺼져가는 삶의 체취를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처럼 많은 말들을 머금고 있으나, 그 말들이라는 것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무의미 덩어리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일상의 공간에서 소멸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길목에는 부조리한 그 무엇이 서성인다. 버려진 물건들의 주인이 느끼지 않았을 아쉬움과 아련함을 대신하여 빈 공간을 고집스럽게 점령한다. 열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들의 주변에 열망이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의 힘이 충만해진다. 불가능이라는 이름의 환영이다. 기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이제 기억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대해 복수를 가한다. 아무도 기억하고자 하지 않은 것들은 역으로 우리의 불확실과 불완전을 드러낸다. 죽음의 사신처럼 말이다.
 
<집-기억>전의 전시 공간에는 기억되지 않은 것들의 유령이 떠돈다. 이름도 없는 유령이다. 그 유령들이 불러들이는 과거의 단상들은 주인 없는 유실물들이다. 발견이나 발굴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는 분실물이다. 심지어는 형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변형되고 왜곡되고 검열된 외형들에는 원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 없는 껍데기들이다. 우리 역시 손님이 되었다가 그들의 주인이 되어 보고는 하나, 유령 놀이는 쉽게 주인의 자리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무수한 시간의 결을 흉내 내고 있기에 그 누군가에 종속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은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다. 부실한 기억의 주체가 바로 유령의 자리이다. 모든 흔적들은 익숙함으로 가장하고 있다. 집에서 쉬이 봄직한 그릇과 화분들(김영섭), 서울의 거리에서 쉬이 마주치는 권태로운 로고들(유비호), 어디서나 마주치는 흔한 반사표면과 반사되는 형태들(김태은), 정확한 국적을 지닌 척 무의식의 경계를 넘는 길잃은 도상들(차혜림), 어둠 속에 묻혀 사실성을 망각하는 작가 자신의 몸(송영규). 이 모든 이미지들은 일상적인 무언가의 기록이기를 자처한다. 역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무언가이지만, 특정함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친숙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를 기억의 주인의 자리로 봉합시키려 하는 힘은 이러한 가장된 익숙함이다. 이 익숙함은 우리가 불특정한 과거에 대한 향수에 가장 깊이 도취될 무렵에 우리를 거부한다. 냉혹하게 배반한다. 친숙함으로 가장한 유령은 기이한 낯설음이 되어 우리의 무의식에 침투한다. 프로이트가 밝혔듯, 결국 기이한 낯설음(언캐니)의 작동 원리는 집과 같은 친숙함이 아닌가. 언캐니함은 곧 집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친숙한 내부에서 마주치는 타자의 유령이다. 반복되는 동질성 속의 공포스러운 이질성이다. 결국 우리를 부조리의 늪으로 빠트리는 것은 우리의 안락함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야만 속의 타자가 아니라 가장 친밀한 영역에서 꿈틀거리는 사소한 삐딱함이다. 질서로부터의 과격한 파격보다 인식의 은밀하고 미세한 차이가 더 폭력적이다. 우리 속에 타인이 존재하며, 우리 역시 타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기억은 공포와 유희의 간극에서, 소멸과 기록의 차이 속에서, 우리와 타자의 공존을 주장한다. 그 공존의 형태는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 누구의 집도 아니며, 우리 모두의 집이기도 한 중간적 영역에는 주소가 없다. 이름도 없다.

서현석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조교수





집-기억 전시는 작가마다 가지고 있는 에피소드를 집이라는 공간에 펼쳐 보이는 전시입니다. 5인의 작가가 서로 다른 집에 대한 기억들을 회화, 입체, 비디오설치 등 저마다의 특성에 맞는 복합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작가들의 다른 기억들은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면서 조립된 부품들처럼 서로 부분, 혹은 전체적으로 조립이 됩니다. 집을 미술 기획의 소재로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집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움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중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으로써의 집은 바로 누가나 지니고 있는 머리 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기억‘ 이라는 장치는 개인 서사를 제조하고, 유지하며, 때로 다른 것과 순서를 뒤바꾸기도 합니다. 때문에’저 사람의 머리 속이 궁금하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에는 타인의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개인 서사는 뇌 안에서 그 비밀스러움이 왜곡되고, 망각되고, 때로는 오랜 시간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집-기억전 작가들의 서로 다른 작품의 형식과 표현은 이러한 기억장치의 다양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시장은 크게 어떠한 개인의 머리 속 공간이 되는 셈입니다. 집과 기억은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을 감추고 보관하는 장소라는 공통된 접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1층 전시장은 외부장치와 연결된 노이즈들이 텔레비전 화면의 노이즈와 섞이면서 집 밖에 드려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김영섭-사운드 설치)합니다. 구둣발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외부소리가 가져오는 부재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킵니다. 두꺼운 벽과 막힌 창문 너머로 들리는 일상의 소음들은 집 안으로 침투하는 소리들로 집 밖과 집 안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송영규의 회화<해바라기>는 그 동안 갤러리 벽에 걸려있던 전통적인 설치방법과 다른 디스플레이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벽 속에 매입시킴으로써 회화 속에 그려진 공간과 실제 공간간의 모호한 경계를 주고 있습니다. 막힌 공간과 시간에 대한 김태은의 실험단편영화(13시, 16mm film)가 집 안으로 들어와 색다른 방식으로 상영이 됩니다. 구형 스크린에 영사되는 왜곡된 화면은 배우의 대사가 빠지고 김영섭 작가의 노이즈가 얹혀져 이질적인 두 개(김영섭작품/김태은작품)의 사건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재현됩니다. 2층 전시장은 조각난 기억들이 서로 흩어져 있는 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비호의 비디오, 입체설치 작업 은 머무르는 집이 아닌 늘 유동적이고 흐르는 시간 속의 집을 의미합니다. 작게 재현된 왜곡된 미니어쳐 건물들은 바퀴위에 얹어져 고정되지 않고 관객에 의해 유동가능한 공간이 됩니다. 유비호의 작품 속 공간은 자본주의와 상업주의가 만들어내는 기억이면서 짧은 시간에 움직이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3D로 카메라 뷰로 구성된 자동차 시점 샷 전경의 풍경은 게임 같기도 하면서 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흥겹게 이동하는 여행자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반면 실내 응접실 분위기를 연출한 김영섭의 사운드 설치 작업은 정적이고 고정된 설치로써 이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6인용 식탁에 놓여진 접시에서는 저녁식사때의 대화 대신 컴퓨터 자판소리들로 채워져 있어 소리-공간-음식을 동시에 체득케 하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 밖에도 화분, 도자기 등으로 분한 소리들이 울림을 통해 집 공간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보이는 물체보다 소리로써 더 강하게 시각을 자극하는 장치는 ‘~을 연상케 하는’ 또 다른 기억의 형식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차혜림의 방은 빈 방에서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한 심리를 드로잉과 회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품와<다이빙(Die-being)>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차혜림의 작업방식은 이미지에 대한 끊임없는 연상작용이 만들어내는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이미지가 조합됩니다. 끊겨지고 조각난 기억들이 몽타쥬된 이미지들은 의도적이거나 무작위적인 이미지의 모순된 결합을 만듭니다.
사방이 검정으로 막힌 어두움 속에서 극적 공간의 모습을 극사실적 기법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송영규 작가의 작업은 어두운 무대에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인공의 단일화된 기억을 나타냅니다. 개인적이고 다분히 주관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것에는 차혜림과 비슷하나 이미지의 결과로 보면 분절된 복수와 강조된 단수라는 측면에서 둘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김태은은 그 동안 보여주었던 키네틱 오브제작품와 인터랙티브 미디어 구조에서 벗어나 영화 스토리라인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소년의 방Boy's room>에서는 필름으로 촬영된 단편영화촬영본을 편집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주인공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대상이 거울을 통해 반복, 굴절 되어 방 주변을 채우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억하고픈 것을 위주로 기억하고 재조립한다는 것에서 착안된 작업입니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전시공간을 좀 더 극적인 공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발상에서 진행되어져 왔습니다. 각자 확연하게 다른 매체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집-기억전에 들어오면서 디스플레이 방식, 매체의 전환 등 적지 않은 변화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매우 개인적인 화두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방법과 대치되는 것으로써 공통된 화두를 제시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매우 힘든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집-기억전은 기억이라는 것을 미술에서의 재현으로, 집이라는 것을 재현을 나타내는 미술관 공간으로 결합해 나가는 것이 공통화두였습니다. 그 안에서 작가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작품 제작을 해 주셨습니다. 개인적 공간의 서사들을 가지고 있는 관객과 작품과의 교감이 서로 간의 공통된 접점을 형성해서 미술관에서의 경험이 오래된 기억으로 남는 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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