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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조각’이 빛이었던 것이다


1. 박소영 작품의 몇 가지 모티브로부터

이율배반 같지만, ‘노마디즘의 병목현상’으로 애초에 유랑의 감수성을 지닌 작가들이 그 트랜드의 덫과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런데도 미술세계 시계는 잘만 간다. 이런 마당에 한 작가를 이미 미술사에 붙박인 ‘조각’이라는 장르로 논하려는 것은 한편으로는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바로 그 ‘병목현상’을 염두에 두면 박소영에게(그리고 우리에게) 조각-작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modo)’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Was soll das?” “그게 뭐?” 벌써 꽤 촌스러워 보이는 1995년 박소영의 개인전도록 맨 뒤 흑백의 작가사진을 보다가 그녀가 발 딛고 있는 독일신문에서 발견한 질문이다.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작업실에 굴러다니다 얼떨결에 작가의 발밑에서 사진 찍혔을 신문 헤드라인 한 구절이, 박소영이 조각-작업하는 이유를 정언명령처럼 상징화하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일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문의 그 문구는 여태까지 미술사의 조각이 벌여온 사태에 대한 박소영의 질문이며, 그녀가 여태까지 다른 무엇도 아닌 조각-작업을 하면서 자신에게 하고 있는 질문이라는 것, 그래서 그 질문이야말로 그녀를 ‘언제나 현재’ 조각-작업으로 이끄는 이유이자 원동력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예술이란 “한 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현”이라는 콜링우드(R. G. Collingwood)류의 낭만주의 미학이 나이브한 예술 신화라고 비판받는 것은 우리가 이미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예술과 예술작품의 의미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그럴수록 더욱 “예술이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된다. 여전히 그러한 질문이 물어지는 것은, 기존 의미체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술이 무엇인지 우리가 완결된 답을 도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예술의 현 사태와 정체성을 묻는 질문 자체가 예술을 이끄는 동학(dynamics)이기 때문이다. 마치 박소영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조각의 행로 중 어느 지점에서 ‘그게 어떻다는 거냐’고 묻는 신문지 위에 발 딛고 답할 힘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 완고하고 무거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모티브를 대입하면서 답하려 애써왔던 것처럼 보인다.

‘유물’과 ‘컨테이너’와 ‘짐’과 ‘껍질’과 ‘빛.’ 성글게나마 박소영 조각의 현재까지 모티브를 추려서 꿰어보니, 그녀에게 독일유학 시절 조각은 현재의 ‘유물’(「유물 Ⅰ, Ⅱ」, 1991)이자 내용은 빈 ‘기념비’(「무명작가를 위한 기념비」, 1993)였다. 귀국 후 유학시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개념’을 구체화한 작업을 하면서 보니 조각은 이미 작가의 논리를 담는 ‘컨테이너’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고, 어느 순간 그러한 개념과 논리와 경직된 비판적 태도까지가 자신에게 부여된 정체모를 조각의 ‘짐’(「덩어리」, 2001/2003)처럼 느껴졌던 듯 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정의 터닝 포인트에서 우리에게 보인 것이 나로서는 박소영의 문제작이라 하고 싶은 「조각의 껍질」(2000)이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폴리코트 깡통 안쪽 면을 조악한 조화(彫花)로 도포한 그 작품이 문제작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조각의 정체성’을 일종의 ‘꾸민 꽃’으로까지 밀어붙인 그 핍진(逼眞)한 태도가 문제작이다. 언제나 솔직한 그녀로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그것, 즉 ‘조각, 그게 뭐?’라고 질문하면서 쉼 없이 작업하는 와중에 자신조차 속아왔던 것은 작가에게 ‘조각’이란 드러나는 시니피앙(껍질)이 아니라 붙잡을 수 없는 시니피에(진리/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때까지 박소영은 조각의 껍질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박소영은 조각의 껍질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조각’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빛이며, 그것은 언제나 저만큼씩 물러나면서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조각은 처음에는 전통적인 권위의 좌대 위에서 빛 바래가고 있는 ‘유물’처럼 보임으로써 무명작가 박소영으로 하여금 당돌하게 비판하도록 부추겼으며, 안이 텅 빈 ‘컨테이너’처럼 보임으로써 “가치의 최대치를 확보하려는 엄중한 심판관적 시선”(백지숙)을 가진 작가로 하여금 개념을 채워 넣어 보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박소영이라는 조각가를 담금질한 ‘조각’은 자신을 껍질의 수준으로까지 내려 앉히면서 ‘조각의 당위적 정체성’을 찾아보도록 그녀를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유물, 컨테이너, 짐, 껍질과 같은 박소영 조각의 모티브는 사실 ‘조각’이 내어주거나 도출케 한 모티브이다. 우리는 그 ‘조각’과 ‘조각가’의 부단한 쫓고 쫓기 덕분에 ‘껍질’로까지 확장된(혹은 축소된) 조각의 세계를 보고 감촉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들은 충분히 긴장된 태도로 필요한 만큼만 발화하며 잘 만들어져 있는데도(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감각의 중추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녀의 작품들은 우리의 인식에 동의를 구하고, 지각을 확장시켜 주기는 하지만, 아직 ‘조각’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각의 ‘빛(Light/das Licht)’은 아침 열시처럼 15° 기울어 정중(正中)하지 못하고 있다.(「집」, 2003)

2. 지연되는 조각의 빛

다시 한 번 이율배반 같지만, 박소영이 내면에 ‘조각이란 어찌된 것이며 무엇인가?’라는 거의 선험적인 질문을 품고 작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은 (오래)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최소한 박소영이라는 한 작가의 ‘조각의 완전성’은 매번 현재의 조건에 의해 혹은 그 조건에 타협하는 작가에 의해 지연되거나 심지어 성글게 봉합된다. 예를 들어 1993년 작 「무명작가를 위한 기념비」는 비스마르크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가져다 놓을 수 없으므로 포토 콜라주로 선보이며, 1994년 작 「책」은 모든 페이지를 인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펼쳐진 두 면에만 눈(eye) 이미지를 채우게 되고, 2003년 작 「껍질」은 작가의 의도에 맞는 제대로 된 좌대를 구할 수 없었기에 MDF로 만든 누런(그리고 거의 멍하다시피 한) 좌대 위에 놓인다. 또한 어떤 작품들은 앞 개인전과 뒤 개인전에서 겹쳐지면서 선보인다. 그러니까 농담처럼 말하자면 그 작품들은 그녀가 구상한 완전한 조각에서 ‘2%’가 부족하다. 작품을 감상하고 평하는 입장에 서서 내가 그 작품들에서 아쉽다고 느낀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작가 박소영이 “사실은...”으로 바로 그 아쉬운 부분에 얽힌 어려움을 토로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녀의 작품이 인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마이너스 2%의 완전성’으로 지연되고 있는 것은, 완전무결함에 대한 의도된 기피도 아니지만, 작가의 감각과 감수성이 2%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이 어떤 부분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슬며시 뒤로 미뤄지거나 봉합되어 버리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지연과 봉합이 감상자인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들에 (감각적으로)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 중 일부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박소영의 어느 작품까지는 이성의 빛은 당도했는데, 감각의 빛은 지연되거나 봉합된 틈 사이로 미약하게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내게 있어 무겁고 낮게 그리고 기울어져 흐르던 박소영 조각의 빛이 가볍고 감각적으로 그리고 정중(正中)한 것은, 지난 2003년 「초록과 짐」개인전에서 선보인 비정형의 붉은색 껍질 작품에서부터로 느껴진다.

3. 박소영의 「라이트」에 대하여

박소영은 이번 가갤러리 개인전에서 일련의 「껍질」시리즈 작품과 그와 같은 방식이긴 하지만 빛이 새로운 요소로 도입된 「등(Light)」작업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투명한 필름에 출력된 가짜 이파리가 유기적인 형태로 집적된 「껍질」시리즈는 그 자체로 탐미적으로 보인다. 불(火)의 표피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색과 육감적인 굴곡을 가진 「껍질」시리즈 중 한 작품은, 이제까지 조각가 박소영이 질문하고 추구했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했던 감각적인 ‘조각의 빛’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절대(absolute)’관념이 극도의 추상 속에서도 명징한 빛을 발하듯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은 형태 속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다. 이 「껍질」시리즈 작품들은 필름조각을 덧붙이기만 한다면 어디로라도 열려져 증식할 수 있으며, 비닐이라는 미끈한 질료 덕분에 자체적으로 반짝이는 동시에 외부의 빛을 끌어 들이고 반사하면서 감상자의 시각으로 날아든다. 여기 이 빛에 만족하지 않고 박소영은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스스로 발광(發光)하는 조각, 「등」시리즈 작품들이다. 기성의 전등갓이나 위성방송용 파라볼라 안테나를 골조로 모조 이파리가 규칙적이고 전면적으로 도포된 표면 혹은 앞에는 형광등이, 백열전구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이 조각들은 기성 조명기구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는 언 듯 댄 플래빈(Dan Flavin)의 미니멀리즘 조각을 연상시키지만, 수공예로 제작된 작품 내 외피 혹은 다른 요소를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분리된다. 공산품의 기계적 반복이 공간 안에서 현상학적으로 구현되는 미니멀리즘 형광등 조각과 달리, 박소영의 「등」들은 그 안에 빛을 내장하게 된 조각이자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껍질을 조각화하는 빛이다. 「껍질」과 「등」을 통해 비로소 박소영의 조각은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빛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박소영의 조각에 이성적으로만이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현재’적인 의미의 조각은 박소영이 계속 질문할 일이지만, 조각의 한 빛줄기(Light)는 여기서 순간 밝게(light) 빛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율배반은 칸트(I. Kant)의 말을 빌려 해 보자. “자연은 자연인 동시에 예술처럼 보일 때 아름답다. 그리고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예술이라고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처럼 볼 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칸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했을 법한 식상한 말이다. 자연조차가 인공적인 우리에게, 물려받은 미술 유산이 너무 완고하고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우리의 작가들에게 이 말은 의미가 텅 빈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소영이 부단히 조각은 어찌된 것이냐고 묻는 의식 속에서 ‘조각의 빛’을 찾아 가는 것을 볼 때, 자연의 꽃과 이파리를 모사한 ‘꾸민 꽃’으로 조각의 본질을 묻는 것을 볼 때, 인공의 빛으로 스스로를 빛내고자 하는 것을 볼 때, 예술과 자연(스러움)은 본래 이율배반적이면서 정주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강수미 /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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