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나는 ‘내가’ 주인으로서 하늘을 보고 남을 보고 세상을 보고 무슨 짓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가끔, 요즘들어 퍽 자주, 내가 주인이 아니라 ‘客’일지도 모른다고, 아니 정녕 客이라고 느낀다. 말하자면, 하늘이 나를 보고 남이 나를 보고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 ․ ․ ․ 결국 나와 세상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주인이기도 하고 객이기도 한, 이도 저도 아닌,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그런 끈끈하고 모진, 버릇 같았을 因緣의 고리 안에서 눈길을 주고받고 하였던 것. 共生의 참뜻.
하여, 내 작업은 내가 본 세상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이 본 나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선의 逆轉’은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凡常치 않은 문제로서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 환기 과정을 통하여 참다운 범상함의 의미를 회복하고 나의 肉身에 밀착시키는 일을 可하게 한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蘭은 풀이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형이상학적∙정치적 ‘말’들(이를테면 외유내강한 선비를 상징하는 대표적 식물로서 이미 장구한 세월을 칭송을 누리며 온갖 아름다운 修辭에 둘러싸여 신비화되어온 사실을 돌이켜보자)을 벗겨내어 난으로 하여금 허허로운 풀의 자리로 데려다주고 싶다. 목숨 있는 것이 어디 난 뿐이랴. 눈 속에서 만난 잡초에게서, 또 공사장에 흉물처럼 방치돼 있는 철근 줄기에게서, 길가에 버려져 온갖 자동차며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채이며 뒹굴던 전선 자투리들에게서 올 겨울 나는 허허로운 목숨붙이들의 숭엄한 모습을 보았다. 하여 이번에는 「不作蘭」이거나 「一劃」 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