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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의 내부에서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 벤야민은 보들레르 시의 숨겨진 모티브 중의 하나가 대도시의 군중이라고 말한다. 그의 시 속에 군중에 대한 묘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보들레르는 군중의 외부에 있는 관찰자가 아니라 군중 속에서 군중에 휩싸인 거리 산보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 자신이 도시인이며 그 자신이 군중의 일부이다. 그래서 군중은 그에게 더 이상 재현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군중은 이미 시인 자신에게 내면화된 어떤 것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경험을 작품화하는 데 있어서 보들레르가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거주민들을 묘사하지도 않았고 또 도시를 묘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양자를 묘사하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양자 중의 한 대상을 다른 대상의 형태로 불러내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김성수의 <메탈리카> 시리즈에서 벤야민의 이 글이 떠오른다. 김성수의 작업 역시 대도시의 스펙터클이 주는 지각 체험을 ‘묘사 없는 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 역설적인 작업이 가능한 것은 작가가 스펙터클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메탈리카>는 도시 스펙터클, 나아가 세계라는 그물망 속에 사로잡힌 우리 자신의 방향찾기에 대한 그림이다. 중첩되는 여러 층을 형성하면서 복잡하게 뻗어가는 직선들과 빛을 반사하는 듯 투명하고 엷은 색면은 대도시의 스펙터클이 주는 지각적 경험을 드러내지만, 여기에는 도시 풍경에 대한 그 어떤 재현적 묘사도 없다. 감각은 있으되 형태는 없는 것이다. 가능한 어떤 묘사도 없이 세계에 대해 말한다는, 어렵지만 해볼 가치가 있는 도전이 여기에 있다.

한편 벤야민이 말하고 있는 것은 보들레르의 시가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 표현주의적 작품이라는 것도 아니다. 김성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메탈리카>는 분명 내면으로 파고드는 풍경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의 어떤 부분에 대해 말하는 풍경이다. 하지만 실제 세계의 모사물로서의 풍경은 아니다. 작가는 도시의 스펙터클 앞에 서 있지 않다. 그는 그 속에 있다. <메탈리카>의 투명한 색면은 작가와 세계 사이에 설치된 창이다. 하지만 그 창은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유리창은 단지 빛을 반사할 뿐 세계의 어떤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창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얼핏 원근법의 격자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원근법은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원근법에 사용된 선들은 작가가 어느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며, 그런 점에서 재현의 기능보다 앞선다. <메탈리카> 연작이 도시의 유리 파사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은 작가 자신의 설명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우리는 화면에서 복잡한 케이블의 얽힘과 철골구조의 흔적을 알아볼 수도 있다. 실제로 작가 자신이 프랑스 유학시절 루브르 미술관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으며, 한국에 돌아온 후 현란한 도시풍경을 접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 나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 속에서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를 인지하는 그 순간에도 작품은 재현적인 기능을 비껴나간다. 이 작품들은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작가가 관계 맺는 어떤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각도와 굵기의 직선들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연한 하늘색이나 보라, 분홍색 같은 화려하면서도 인공적인 색들이 그 사이에서 빛난다. 단지 여러 각도와 굵기의 중첩일 뿐인데도 선들은 여러 겹의 층을 형성하고 있는 듯 보이며 화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듯 느껴진다. 색면은 완전히 균일하게 칠해져 있기도 하지만,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조금씩 다른 톤으로 빛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선과 색면의 관계를 배경과 형상이라는 용어로 묘사하기란 어렵다. 두 가지는 기묘하게도 같은 선상에 존재하면서 서로에 대해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아크릴과 유화물감이라는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겹쳐 있다기보다는 서로를 압박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선은 색의 평면 위에 그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선을 절단하고 에워싸는 듯하고, 색면은 선의 주변에서 퍼져나오는 빛의 파장처럼 느껴진다. 선은 그 빛에 투영된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들은 평면 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듯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삼차원의 일루전으로 확장된다. 즉 캔버스의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서 무한히 연장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살짝 느껴지는 일루전의 존재는 선과 색이 만나는 모서리에 입체감을 주거나 색면의 톤을 다르게 칠함으로써 드러나기도 한다. 여러 겹의 층을 관통하면서 느껴지는 일루전의 감각을 좇다보면 바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기증을 경험하게 된다. 이 현기증은 도시의 스펙터클이 가져다주는 감각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그물 속에 사로잡힌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감각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 그 자체가 우리에게 현기증을 가져다준다.

<메탈리카> 시리즈는 재현적 풍경도 표현주의적 풍경도 아니며 세계를 그 구성요소로 단순화시키는 일반적인 기하학적 추상과도 다른 것을 겨냥한다. 작가는 그동안 <메탈리카> 시리즈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변주해왔다. 2007년 사루비아 다방의 전시 와 같은 해 몽인아트센터에서 열린 <-스케이프> 전시에서 작가는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고 큼직한 선들과 채도가 낮은 남색, 검정, 보라 등의 색채를 사용했다. ‘Ephémère’라는 제목답게 사루비아 전시에서는 전시 기간 동안 벽화 작업을 해서 완성한 작품을 전시 마지막날 모두 해체하여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가격으로 판매했다. 도시의 스펙터클이 가진 화려하지만 공허한 속성을 작품의 존재방식으로까지 확장시켜 보여준 작업이었다. 몽인아트센터 전시에서는 이 작업이 유리 파사드를 가진 건물들에서 기원했음을 좀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업들을 내놓았다. 선들 사이의 색면은 불투명한 평면이 아니라 빛을 투사하는 투명한 공간임이 드러났다. 2008년의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열었던 개인전에서 이 유리 구조물은 좀더 복잡한 양상을 띠며 데칼코마니처럼 중첩되기도 한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것 같은 아찔한 각도의 느낌도 등장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한층 더 밀도있는 구조와 더 밝은 색채를 갖고 있다. 선의 교차는 더 복잡해졌지만 일루전에 대한 암시는 오히려 더 줄었다. 구조는 정교해졌지만 화면은 간결해졌다. 기계적인 우아함이 지배하는 화면은 실제 캔버스의 무게보다 왠지 훨씬 더 가벼울 것처럼 보인다. 바닥없음 혹은 깊이없음의 느낌이 더 강해졌다.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어떤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모든 작업은 수공적으로 진행되지만 수작업의 느낌이 거의 나지 않는다.

이번 전시 작품을 기점으로 예전 작업들을 되돌아본다면, 작품들이 ‘점차 추상화의 길을 걸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메탈리카> 시리즈가 도시 스펙터클, 특히 유리 파사드 건물을 추상화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이 그림은 특별할 것이 없다. 도시의 풍경을 단순화켜서 만든 추상화란 몬드리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메탈리카>는 몬드리안적인 추상화와는 다른 지점을 겨냥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그림들은 세계와 우리 사이의 방향설정에 관한 그림이다. 필자는 위에서 그림의 선들이 원근법의 격자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그 사실은 겉보기보다 중요하다. 그림 앞에 선 관객들은 자신이 그림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오차없이 그어지고 칠해진 선과 색면이지만, 관객이 작품에서 차가움보다는 어떤 멜랑콜리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선과 색면들이 관객 자신의 위치와 관련된 감각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관객 위로 쏟아질 듯 느껴지기도 하고, 관객이 서 있는 지점에서 멀리 뒤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메탈리카>는 평범한 유화와 아크릴 물감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전시장의 조명을 받으면 기묘하게도 내부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이다.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자폐적인 느낌이다. 이 느낌은 인물과 꽃을 그린 다른 작업들에서도 발견된다. 인물의 특징을 매우 정교하게 묘사해서 거리에서 이들을 만난다면 당장 알아볼 수 있을 정도지만, 사실 이 그림들은 그 인물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배경은 물감으로 꽉 차 있어서 인물들이 숨쉴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명확하고 깔끔하게 칠해진 표면은 인물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이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은 <메탈리카>의 선과 빛이 면이 쏟아질 것 같다는 느낌과 통한다. 스펙터클 속에 사로잡힌 도시인들은 그 속에 사로잡힌다. 현란함에 사로잡혀 감각이 마비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인가? 대도시가 구성원들에게 주는 소외의 경험은 <메탈리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험이 존재하며 그것에서 우리가 반발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예술작품이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메탈리카>의 장점을 그 주제의식에서만 찾는다면 작품의 장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소외의 경험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제의식의 확장까지 담보한다면 훨씬 더 발전된 작품이 가능하지 않을까? 작업의 미래는 필자가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한 가지 단서처럼 떠오르는 이미지는 있다. 그것은 첩보영화 속에 클리세처럼 항상 나오는 장면이다. 적의 기지에 몰래 침입하는 우리측 요원들이 어둠 속에서 적외선 감지기를 작동시키면, 바닥에서 허리 높이까지 깔린 수많은 붉은 색의 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복잡하게 교차되는 선들 중 어느 하나라도 건드리면 경보기가 작동된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선들 사이를 유연하게 지나간다. 필자에게는 이 선들이 <메탈리카>를 형성하는 선들처럼 느껴진다. 도시의 스펙터클을 이루는 무수한 선들은 거기에 매혹된 구성원들에게 치명적인 위험을 내장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붉은 적외선의 선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하지만 붉은 적외선의 선들은 안전하게 그 공간을 지나갈 수 있게 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화가가 화면에 긋는 하나의 선 역시 마찬가지의 기능을 할 것이다. 그것은 그린다고 하는 행위에 내재한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동시에 카오스로서의 세계 속에서 길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적외선등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령 /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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