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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개인전 : 자본주의의 푸른 꽃

그렇지만 그 푸른 꽃은 꼭 보고 싶어. 그 꽃은 잠시라도 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아. 나는 푸른 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그것만 시로 쓰고 싶어.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야.(노발리스)

1.
김성수의 작업은 크게 세 종류로 구별된다. 첫 번째 인물 연작. 이것은 대체로 정형화된 인물군상을 보여주는 작업으로서, 대략 2005년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된다. 그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양식적・기교적 차이가 상당하다. 동일한 유형을 반복하다(2002), 유형자체로 선회했고(2004), 형식의 세련화로 넘어갔다. 두 번째 건물 연작. 엄밀히 말하면, 건물로 한정하기 어렵다. 건물을 포함하는 도시전경이라 해야 정확하다. 네온의 불빛, 온갖 기호들, 건물의 창문, 강철의 뼈대 등등, 도시의 풍경을 수놓는 다채로운 형상들이 출현한다. 올해 2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렸던 <에페메르Ephémère>는 그것을 짜임새 있게 완성시켰다. 여기서 그는 완성도 높은 스타일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전시전체에 자신의 구상을 전개시켰다. 두 달 동안 전시공간에서 직접 작업하여 설치하고, 이 과정을 비디오 찍어 상영한 후, 전시가 끝날 때 작품을 철수하지 않고 소멸시켰다. 내용・과정・형식에서 덧없음Ephémère의 삼위일체를 이뤄냈던 셈이다. 이것은 그의 문제의식이 캔버스 너머의 현실에 정확히 꽂혀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에페메르>는 그의 작업이력에서 중요한 전기를 이루는 셈이다. 세 번째 꽃 연작. 질료로 봤을 때, 이것은 앞엣것들과 딱히 연관이 없어 보인다. 주체와 세계는 전통적 존재론의 범주인데 반해서, 꽃은 둘 가운데 어떤 짝패를 구성해도 어색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아니고, 거리에서 꽃 파는 소녀도 아니다. 개념의 측면에서, 솔직히 뜨악한 구석이 없지 않은 것이다. 철저한 분석에 따라 체계 있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그였기에, 더욱 생뚱맞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인물, 건물, 꽃의 질료적 관련을 찾는 것은 무익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꽃이야말로 주체와 세계의 견고한 범주를 흔드는 실마리는 아닐는지. 가슴 속 깊숙이 숨겨 놓고서 말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접어 두자.

2.
<멜랑콜리>는 <에페메르>에서 없었던 두 가지 질료가 주역이다. 꽃과 인물. 예전 작업과 새로운 작업이 섞여 있는 탓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지만 중요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인물연작도 여자가 등장하여, 미묘한 변화를 보이긴 하지만, 꽃만큼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전과 달리 꽃이 ‘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의 꽃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인공의 전자적 세포로 이루어진 형광의 꽃이라고 할까. 유념할 점은 김성수의 작업은 진짜보다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hiperreality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실재를 가장하지 않고, ‘과잉’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밝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성수의 시선은 거리를 분명히 두고서, 현실의 모습을 냉정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연작을 연대기 순서로 지켜보면, 점차 빛을 발하는 캔버스의 표면에 비해서, 대상들은 점점더 생기와 정체를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거의 빨아 먹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입체의 건물은 평면의 추상적 기호로 전환되고, 인물은 개성을 상실해 내면을 잃어가는 등등. 시들어 지는 꽃은 마침표를 찍는 것이리라. 너무 비관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논리적 결과로 볼만도 하다. 현재의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존재는 점점 추상적 기호로 ‘번역’되고 있다. 사물은 물론이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백화점 쇼윈도에서 어서 빨리 사가라며 눈길을 현혹하는 상품의 반짝이는 외양을, 화장과 성형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깊이를 상실하고 표면으로 전화되는 양상을 생각해 보라. 그렇게 보니, 그의 형광빛 표면과 요즘의 기만적인 ‘화장발 생얼’은 묘하게 닮아있다. 또한, 개인의 ‘스펙’ 운운하며, 상품의 기능목록 정도로 존재의 지위를 하강시키는 세태를 되씹어 보라. 그저 사물인 것이다.

3.
소재 못지않게 스타일의 문제도 중요하다. 앞서 지적했듯, 그의 스타일은 점차 정제되고 있는데, 특히 표면의 표현과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그의 스타일을 보고서, 요즘 눈이 아프도록 유행하는 ‘나를 봐요’ 식의 중국회화를 떠올린다면, 정확히 오해한 것이다. 결과가 비슷해 보인다고, 진화의 과정이 틀린 것을 간과한 생각이다. 그의 표면은 형광빛 외에도, 매우 매끈한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형식적 평면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 깊이없음의 결과로 봐야 한다. 앞서 지적했듯, 김성수의 소재는 저마다 자신만의 내용을 상실했다. 꽃은 생기를 빨아 먹혔고, 인간은 정신을 놓아 버렸다. (<에페메르>에서 네온의 기호와 건물의 뼈대도 비슷한 결과겠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미롭게도 없어진 깊이를 표면의 광채로 보충한다고 할까, 형광빛 표면이 조응하게 된다. 속 깊은 내용이 반짝이는 형식으로, 표면의 과잉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형식이란 ‘내용의 논리’라는 것을 정확히 보여준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현실에 바투 육박해 가지만, 전통적 반영론을 간단히 넘어서 버린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회적 원료가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제임슨) 그것이 바로 그의 스타일의 정체다.

4.
저 옛날 노발리스의 푸른 꽃은 낭만주의자의 ‘희망’을 상징했었다. 오늘날 김성수의 형광빛 질린 꽃은 현대인의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초점 없는 인물의 눈동자는, 망연한 표정은, 희망도 기약도 막막한 현실을 넌지시 일러준다. 사람도 사물도 팔리지 않으면, 시장에 등록되지 않으면, 생존의 기회조차 얻기 힘든 조건에서, 한점의 그림과 한줄의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식의 뻔하디 뻔한 자조가 자조가 아닐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살아있고 그래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패배하는 모습을 스스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주체의 마지막 자유를, 쓰고 싶은 자유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를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촌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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