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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장소로서의 빛의 공간
     
      작품의 시작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학 초기, 하루하루를 긴장된 채 살아가고 있던 시절, 머리를 빗다가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담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잘 보듬어 모아 두었었다. 그렇게 마음처럼 허전하게 빠져나간 머리카락으로 무엇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은 부유하는 자신을 어딘가에 동여매고 싶은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들은 흘러 가버리는 인생이 존재를 각인시키는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함연주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카락에 대해 자기 연민을 거두고 그것을 객관적인, 예술 작품의 조형적 재료로서 등장시킨다. 따라서 머리카락 자체에 어떤 내용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또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이나 은유를 담는 미술 오브제의 구성 요소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머리카락만이 지닌 재료의 특질을 주목하고 실제 재료와 부딪치는 과정 속에서 사용된 자신의 신체 에너지, 재료의 반응, 우연성, 변화 등이다.
      그가 재료에 가하는 것은 무거운 돌이나 나무처럼 일정한 도구를 사용해 재료를 통솔하거나 지배하는 힘이 아니다. 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가느다란 머리카락 위에F.R.P.원액을 조심스럽게 발라가면서 단지 마티에르를 자극할 뿐이다. 그로써 재료 자체의 고유한 특성에 내맡겨진 마티에르의 자율적인 표현을 강조한다. 마티에르의 특질을 그대로 따르는, 즉 장력과 빛이 통합되어 하나의 예술적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 작업을 하기 전부터 조각의 일차적 언어랄 수 있는 재료에 대한 존중 속에서 재료 자체의 본연의 힘과 언어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했었다.  인장 강도를 드러내는 스타킹, 색채와 탄력의 쇠퇴 과정을 보여주는 라텍스, 탄성을 지닌 용수철, 자력에 반응하는 금속 등을 이용한 작품들이 그 예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벽에 걸리거나 천장에 매달려 형태의 변화 가능성을 암시하고, 때로는 작은 책 속에 담겨 우주라는 공간을 촉각적으로 감지하게 한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볼 수는 없는 자연의 에너지를 가시화 한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가능성을 내포한 형태의 특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 변화가능성이란 형태가 형성되자마자 외부의 어떤 압력이 조금이라도 가해지면 금새 파괴될 것 같은 예민한 경계를 나타내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은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작가가 조심스럽게 재료를 다루는 손작업의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긴장감이 마침내 긴장을 암시하는  예술적 형태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연주의 작품은 재료와 제작 과정과 작가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형태화된 결과물로서 강한 예술적 효과를 창출한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긴장은 이중성을 함유한다.  일반적으로 긴장은 어떤 상황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불안의 상태일 수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불안감에서 벗어나 안위의 상태를 갈망하는 것을 역설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우선 관람자들로 하여금 작품과 처음 만나는 순간에 재료와 작가의 예민한 손길을 간과한 채 우선 부드러운 탄성 속에서 그의 머리카락들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복잡한 인위적인 세계가 아닌, 어둠 속에서 집을 짓고 있는 거미줄이나  새벽녘 이슬에 맺힌 나뭇가지, 그리고 밤하늘의 성운과 같은 자연의 세계이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고요한 축제의 세계이다.
        특히 대안 공간인 사루비아 다방에서의 설치는 그 세계가 어둠 속에서 얼마나 빛을 더욱 발하는가를 매우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시멘트로 구획되어 건물의 골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어두운 공간을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투명성으로 무게감이 사라진 전혀 새로운 환경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평범한 일상적 공간을 예술 작품으로 그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대안 공간만이 지닌 잠재적 특성을 성공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머리카락이라는 구체적 물질이 공간을 복잡하게 가로지르며 만들어낸 이 실재의 공간은 머리카락 위에 알알이 맺힌 투명한F.R.P. 방울과 빛의 만남으로 머리카락이라는 실체는 사라지면서 감각적인 빛의 환경으로 변화된다. 이 환경 속에서 관람자는 빛이 안내하는 공간을 따라가며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환경을 체험하면서 다양한 공간의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이 가능성은 때때로 관람자로 하여금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 공간을 넘나드는 독특한 정서 상태를 이끌어낸다.
      이처럼 함연주의 설치는 관람자로 하여금 구체적 환경을 신체로 경험하는 과정 중에 이 공간이 독특한 의식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관람자가 공간 속을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환경과 일체가 되면서 독특한 심리적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작가가 제작 과정 중에 체험하고 추구한 예술적 표현인 긴장을 관람자도 동일하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느다란 빛의 선들이 관람자의 동선을 결정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재료의 설치 방식이 때때로 관람자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므로 관람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신체의 움직임을 조절해가며 작품 사이를 걸어 다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즉각적인 현재성이 강조되고 작품의 의미는 이러한 신체적 체험이 수반될 때 더욱 살아난다. 이와 같이 함연주의 작품은 재료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 지닌 자율적인 창조력과 공간 해석으로 관람자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독려한다. 그리고 재료, 창조 과정, 예술가, 관람자, 이 모두가 동등하게 역동적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낸 하나의 총체적 상황으로서 특수한 장소로 자리한다. 
            
     
박숙영 / 이화여대교수, 조형예술학



올을 풀어 집을 짓는 작가, 함연주
 
“예술가는 고독 속에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이 끊임없이 통제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만. 그것이 없다면 관념과 이 관념의 실현간의 불가분의 통일성이 외부의 침입에 의해 깨어질 수도 있다.”-글렌 굴드
 
벌써6년 가까이 머리카락을 모았다. 매일 매일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은 그렇게 작가 주변에 쌓이게 된다. 그리고 이 거역할 수 없는 흔적들은 박스 안에 차곡차곡 담겨 진다. 의도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획적으로 정리한 적도 없다. 내가 만난 작가 함연주는 정리에 민감하다거나 특별히 깔끔을 떠는 성격도 아닌 듯 했다. 매일 아침 머리를 빗는 일상적 행위 뒤에 발견되는 낯설음은 우리 누구나 겪는 평범할 것도 없는 삶의 법칙이다. 박스 안의 머리칼들이 쌓이면서 작가는 조심스레 실험을 하게 된다. 평소에도 끈이라든가 실 같은 재료에 관심이 있던 터라 작가는 자연스럽게 머리칼로 뜨개질을 한다거나 드로잉 재료로 사용한다거나 하는 식의 사소한 실험을 하게 된다. 습관적인 행위 뒤에 숨겨진 철학이나 개념 따위는 의도되지 않았다. 너무 나이브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와 같은 작가의 태도엔 나름의 확신이 느껴진다. 그저 자신이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행위가 곧 그녀의 작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사용하는 태도에 대해 뭔가 심오하고 철학적인 또는 개념적인 의도를 얘기해주길 바라는 것 같다고 나에게 되물었다.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생명을 다한 대상에 대한 엘레지라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사실, 작가와 얘기를 하기 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와 한참동안 수다를 떨다보니 나 역시 이론이란 정형화 속에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대화(수다에 가까웠다) 중 나는 작품의 출발과 그 과정 그리고 사루비아 다방의‘퍼포먼스’에 이르는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박스 안의 머리카락들...
 
함연주는 박스 안에 머리카락을 차곡차곡 쌓다보니 무게에 눌려 납작하게 뭉쳐버린 머리칼들을 발견한다. 개념적 미술과 그 출발을 달리하고 있는 그녀의 작업태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런 행위는 역설적으로 개념적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바로 머리카락-재료이자 소재-의 질감이 나빠지자 직감적으로 어느 정도의 부피가 쌓이게 되면 다른 박스 속에 머리카락을 담기 시작한 작가의 반응 때문이다. 납작해진 머리카락들은 작업의 재료로서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다보니 작가는 계속 머리카락들을 소중히 박스에 담게 된다. 심지어는 여행 중에도 조심스레 티슈에 머리칼들을 싸온다고 한다.
개념적 출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기록들은 정성스럽게 이 박스에서 저 박스로 옮겨가면서 차곡차곡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박스가 쌓일수록 시간의 부피도 시각화, 물질화 되어간다. 시간은 얼굴에 남는 주름이나 떨어지는 낙엽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이처럼 추상적 시간을 시각적 시간으로 환원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제 자신의 임무를 마친 머리카락들은 오히려 더 소중하게 박스 안에 간직된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 잠시 인큐베이터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녀에게 머리카락들은 생명의 단위들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단위들은 하나의 형태소가 되어 다시 거대한 집을 이루게 된다. 한 올 한 올 머리카락들을 정리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그녀는 다시 한 번 재료와 교감한다. 작가에게 재료란 무생물을 뛰어넘는다. 흙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졌고 또 그 안에서 인간은 신성함을 느꼈다. 흙이란 물질은 물성을 뛰어넘는다. 함연주의 머리카락도 물성을 물성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형태로 재생된다.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칸트가 이야기한 초월성임을 다시금 떠올린다. 사소한 물질이 모여 거대한 집을 만들어낸다. 하찮은 것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환원되는 유쾌한 전복이 여기 있다.
 
재료를 느낀다
 
나는 궁금해졌다. 머리카락을 다루는 물리적인 작가의 반응이 말이다. 작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얘기를 쏟아낸다. “참 재미난건요...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다 다르다는 거죠.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건 가늘고, 빨갛고 까맣고, 잘 끊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탱탱하게 힘을 받고 탄력이 좋은 것도 있어요. 투명frp를 한 방울 떨어뜨려보면 어떤 것은 그냥 퍼져버리는데 어떤 것은 방울방울 저절로 맺혀지는 것도 있죠.” 그녀는 마치 자식자랑을 하는 사람 같았다. 순간 에바 헤세가 떠올랐다. 헤세의 일기엔 늘 작업과정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수많은 고민과 갈등, 트라우마, 격정 따위의 감정을 쏟아내던 헤세의 글엔 작품에 대한 연민이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현실의 고독은 그처럼 작품과 작업과정의 애정으로 대체되었다.
또 다른 작가로는 루이즈 부르주아가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작품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 녀석, 저 녀석 하면서 자신의 조각들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버린다. 함연주는 대화 도중 자신이 어릴 때부터 간직한 조그만 인형에 대해 언급했다. 어린 함연주는 그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모두 잘 이해할 것이다. 많게나 적게 우리는 사물과 소통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작업의 과정은 재료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재료는 작가에게 말을 건다. 작가는 시인의 눈과 마음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돌에서 나무에서 이슬에서 영감을 받고 대화를 나눈다. 다빈치가 낡은 파베(돌이 박힌 도로)나 거친 담벼락에서 미적 감흥을 받았으며, 로댕 역시 대리석에서 연인의 아름다운 포옹을 연상한 사실이 떠올랐다.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발견되는 것이다.
 


형태를 만들다

 
머리카락이 형태를 가진 오브제로 탄생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린 듯 했다. 함연주는 쉽게 포기하는 스타일도 아닌 듯 했고, 또 그리 급하게 서두르는 편도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삶도 작업도 흘려보내는 사람이었다. 초기의 실험들은 쌈지스페이스의 전시에서 아치형태의 오브제들을 만들어내면서 세상에‘머리카락작가’라는 일종의 수식어를 듣게 된다. 쌈지에서의 실험은 곧바로 사루비아의 작업으로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함연주의 머리카락 작업은 기존의 조각성을 토대로 형태를 가진 오브제의 성격이 더욱 드러났다면, 이번 사루비아의 올 작업은 형태와 조각성의 파괴가 두드러진다. 부피감과 덩어리감이 상실되면서 그녀의 작업은 공간을 만나고 공간을 탐색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사루비아의 작업이 주는 탐미적 성격은 이런 부분에서 기인되는 것 같다.
조각성의 파괴는 함연주에게 새로운 우회로를 찾는 계기로 여겨졌다. 머리카락작가라는 타이틀은 자칫 자기복제라는 함정의 유혹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이미지를 투사한다. 그러나 조각적 형태와 부피감을 버리고 사루비아 공간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머리카락은 이미 세인들이 상상하는 함연주에서 살짝 비껴나간 인상을 심어준다. 공간과의 대화는 머리카락작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감을 통해 공간을 탐색하고 대화하는 태도에서 머리카락이란 재료에 덧씌워진‘아우라’는 사라지고 거미집이라는 전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머리카락 작업은 공간에 설치되고 동시에 공간에서 사라지는 한시적인 인시튀(in situ)작업이다. 공간을 점유하지만 동시에 영속적인 거주공간이 아닌 일종의 가-공간인 것이다. 더불어 사루비아의 거미줄-거미집은 기생공간이다. 사루비아는 작가에게 자신의 날몸을 제공한다. 사루비아 다방은 하나의 신체가 되며 함연주의 거미집은 사루비아라는‘신체’에 기생하는 공간이다. 다소 생물학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러한 담론은 앞으로 전시 후 모든 것이 철거된 후에 더욱 강하게 드러날 듯 하다. 
 
공간의 발견-두 개의 신체
 
머리카락을 얘기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신체의 담론을 꺼내야한다. 머리카락이 주는 에로티시즘과 신체의 일부에서 다른 정체성을 부여받은 머리카락이란 소재가 갖는 당연한 해석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해석을 이해하지만 반대로 이와 같은 해석이 던지는 한계에 대해 무척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여성이며 머리카락이 여성성의 상징이고 에로티시즘의 요소이며 직조를 하는 듯한 작업태도 때문에 페미니즘적인 해석이 가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우리는 신체는 성이라는 담론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올바른 해석의 잣대이지만, 더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일 것 같다.
하나의 신체가 또 다른 신체를 만난다는 것 역시 다소 에로틱한 감상을 전달한다. 그러나 작가는 사루비아의 몸에 거미집을 엮으면서 드라마를 그려내진 않았다. 관객은 거미집을 감상하고 경험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동시에 사루비아라는 신체를 감상하게 된다. 이는 설치미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좋은 예를 제시한다. 설치의 경우 대표적으로 두 가지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연극적 설치이며 다른 하나는 건축적 설치라고 할 수 있다. 연극적 설치는 공간을‘전환’시키면서 본래 공간의 지닌 정체성은 상실되고 새로운 공간이 입혀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로 건축적 설치는 본래의 공간정체성이 유지되면서 새로운 공간이 들어오는 경우다. 함연주의 거미집은 두 번째의 공간감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공존의 공간인 것이다. 공간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공간을 입히는 행위는 공간의 잠재성을 보여주기는 하나 연극적 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진정한 공간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마치 보기 싫은 형태만을 감추는 임기웅변의 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성 역시 현대미술의 중요한 담론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사루비아는 하나의 모체가 된다. 모체는 새로운 형태를 잉태하지만 자신을 버리는 희생은 취하지 않는다. 모체와 기생체는 공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설치의 좋은 예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공간의 발견-사루비아 다방의 숨은 통로
 
공간과 장소는 다른 것이다. 공간이 물리적인 성격을 지녔다면 장소란 추상적이고 비 물질적이다. 물론 공간이란 대상도 비 물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공간의 물리성이란 삼면이 만나 이루는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장소란 추상적이고 정치적이며 역사적이다. 장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건이 필요하다. 사랑, 죽음, 이별, 전쟁, 기념비 등은 장소를 말하는 목록들이다. 이에 반해 공간은 순수한 물리적 만남을 의미한다. 사루비아와 거미집의 만남은 공간을‘보이게 한다’. 이미 존재하는 사루비아 공간에 거미집은 우리가 미처 잡아내지 못한 공간들을 보여준다. 작은 쪽방이 놓인 벽면의 두 개의 구멍들은 사루비아 다방에서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소외된 공간이었다. 함연주는 바로 이 공간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거미집은 사루비아의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바슐라르의 위대한 공간철학에서도 유난히 내 마음을 사로잡던 모서리의 미학은 여기에서도 빛이 난다. 벽과 벽이 만나 형성된 모서리는 공간의 탈출구다. 바로 이 모서리를 출발해 공간은 확장되고 퍼져나간다. 거미줄의 습성이 그러하지만, 함연주의 거미집도 벽과 벽 천정과 바닥을 서로 연결 지으며 확장되고 얽힌다. 하나의 출발선은 또 다른 선을 만나고 그 선은 또 다른 선을 만나면서 얽히고 섥히게 된다. 그러나 이 거미집이 무조건 자동기술법에 의해 그려진 공간 위의 드로잉만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적 개입이 은밀하게 숨어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게임을 즐길 줄 아는 작가였다. 그녀의 거미집 사이에는 작가 홀로 들어갈 수 있는, 즉 그녀만(큼)의 부피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숨어있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은신처처럼 그녀는 성인이 된 지금도 자신만의 은신처를 요소에 숨겨놓으면서 일종의 안도감을 찾는 듯 했다. 작가란 기본적으로 내면적인 인물인가보다. 어쩔 수 없는 창작의 욕구는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전시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이지만, 모순적으로 자신을 숨기는 고독의 공간 역시 그 안에 숨어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바로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작가는 꿈꿀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상식적인 해석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나도 그녀를 따라 그 공간에 들어가 보았지만 나에게 그 공간은 너무나 작았다. 작가의 신체적 흔적은 은밀하게 거미집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덧붙인다. “나는 사람들이 별자리를 보듯이 제 작품을 읽어주길 바래요”라고 말이다. 별자리를 읽는다는 말이 시처럼 느껴졌다.
 
 
후기-고독한 유희
 
작가는 그녀만의 은밀한 공간 안에서 자신만의 유희를 즐긴다. 그 안에서 그녀는 카시오페아, 북극성을 그려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음반리스트를 몇 개 적어왔다. 냇킹 콜, 스탄 갯츠, 엔리오 모리코네 와 같은 이지 리스닝이 있었는가 하면, 카운터테너의 아베마리아 모음곡도 있었고 부다 바와 같은 라운지 뮤직 그리고 절대로 빼먹지 말아야 할 크리스마스 캐롤들...
 
관념적인 미술이 있고 개념적인 미술이 있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미술이 있다. 그 어떤 미술의 태도에도 고민이 있고 고통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벗어난 유희적 미술도 존재한다. 사뭇 원초적이고 유아적인 태도로 작업을 해나가는 그녀는 냇킹 콜을 들으면서 머리칼들을 정리하고 사루비아라는 모체에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거미집을 지었다. 집은 짓는 내내 음악을 들었다. 특히 도원경에‘이 비가 그치면’을 계속 들었다. 비가 그친 숲은 물기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나무도 잎도 하늘도...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거미줄에도 물방울이 맺혀있을 것이다. 비가 그친 새벽의 숲에서 발견되는 풍경을 그려보면서 사루비아가 거대한 숲이 되어버린 듯 하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이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한 올 한 올 거미집을 엮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35일이나 말이다.
참, 잊어버릴 뻔 했다. 작가는“전 작업만 하지는 않아요. 다방에 들어와서 음악도 듣고 멍하니 거미집을 바라보기도 했어요” 라고 말이다. 그녀는 정말로 사루비아 다방에 머물렀던 것이다. 진정한 노마드의 정신이다. 거미 역시 노마드의 상징 같은 존재 아닌가.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삶이다. 또 어떤 새로운 공간과 장소를 만나‘공간 위의 드로잉’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하게 될지는 더욱 궁금하다. 방법은 하나. 기다릴밖에.
 
정현/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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