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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할 것들에 대한 기념비

아트포럼뉴게이트에서의 지난 개인전 ‘Face to Face’에서 이재훈은 가면과 같은 익명적인 얼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당신의 얼굴은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으로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음은 진정한 개인의 얼굴을 차단한 채 피상적으로 맺고 있는 현대인의 소통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2년만의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이재훈은 한층 더 진화된 어법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최근 작 속에는 ‘gloomy generation’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타인과 교류하지 않고 홀로 행동하는 ‘나홀로족’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작가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gloomy generation’으로서 이재훈이 모색하고 있는 방식은 다름 아닌 소통에 대한 것이다. 그는 사회의 형식적 틀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한 얼굴들과 소통하기를 희망하면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소통의 벽을 향해 딴지를 걸고 있다.
제목을 통해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지만, 이재훈의 신작들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적 통념들을 일정한 형태들로 표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들에서 나타났던 표피적이고 익명적인 얼굴들은 보다 실체화된 상(像)들로 변화되었고, 각각의 상들은 ‘인생상’, ‘백수상’, ‘미인상’, ‘선생상’ 등 사회 속에서 특정하게 스테레오타입화된 개념들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들은 모두 다리가 없는 반신상의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대부분 눈이 가려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신상들은 동양화 재료와 프레스코 화법을 혼합시킨 기법으로 구현된 석상(石像)과 같은 질감, 형태가 암시하는 부동성(不動性)으로 인하여 생명력이 탈각된 박제와도 같이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반신상들이 각각 사회적 통념들에 대한 기념비(monument)들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념비는 그 공공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종종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측면 보다는 집단적인 이상을 반영하는 언어적 기능을 한다. 대부분의 기념비들은 사회를 조직하는 특정한 제도적 규범 내에서 통용되며 집단의 사회적 역할을 이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정치언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감정, 정신성, 개인의 개성이 개입되기 어려운 사회제도로서의 영역만이 존재한다. 이재훈은 이러한 기념비들이 안고 있는 피상적 특성과 표면적 기호로서 존재하는 기능을 활용하여, 그가 직면하고자하는 소통의 벽에 대한 상징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기념비들에 ‘비(非)기념비(unmonument)’라는 신조어를 붙였다. 이와 같은 표현은 사회적 관념들에 대한 지시와 표식 그 자체의 기능만을 가질 뿐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한 기념비의 역할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기념비 자체가 아니라, 기념비화된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적 통념의 유형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모뉴멘트로 세워질 만큼 확고한 제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정신적인 기능은 왜소하기 그지없다. 개인의 삶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치사회적 윤리, 무수히 반복재현되는 규범을 위한 규범들, 영혼이 살지 않는 껍데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우상들의 자리를 이재훈은 신랄하게 꼬집는다. 실상 무엇의 기념비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대치물 기능을 하는 것이기에, 기념비는 존재 자체로 실체의 부재를 지시하는 역설을 안고 있다. 이 기념비들을 통하여 이재훈은 본질과의 접촉을 상실한 채 단지 기호로서만 존재하는 가치체계들의 허위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은 내면적 진실과 외면적 형식 사이의 간극에 대해 작가 스스로 느꼈던 괴리감에서 출발한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시화하기 위해 이재훈이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방법은 오로지 유형화된 형식들로만 구성된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개인이 하나의 사회적 타이틀로, 일정한 집단의 상징물로 대치되어 버린 세계,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허식들의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관람자들을 그 허망함 앞에 직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재훈의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이나 ‘바르게 살자’와 같은 급훈은 학교 내의 제도적 규범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과정이나 동기가 생략된 채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옳고 그름과 윤리적 강령에 대해 그는 ‘다들 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참 잘했어요’라는 문구와 <다들 잘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충돌은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하다. 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오래된 석상의 기념비적 아우라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굳어져 화석화되어가고 있는 버려야할 규준들을 되돌아 보게 한다. 이재훈은 이러한 표현법에 대해 “찰라에 보여지는 무수한 모호한 상들 뒤에 오버랩되는 그 진상(眞像)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분히 불교적인 성찰이 엿보이는 이 대목에서, 눈이 가리워진 반신상들이 결국 보고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의 삶에 대한 메타포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재훈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한쪽 벽면에 채워진 대형 작품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폐허와 같은 무상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이 작업은 소위 ‘상아탑’으로 불리워지는 대학의 모습을 다룬 것이다. 이 작업은 거대한 스케일, 상들이 집적되어 있는 형태, 프레스코 기법으로 구현한 돌 같은 질감으로 인해 그 자체가 실제의 모뉴멘트처럼 느껴진다. 형식적 기호를 지시하는 기호 자체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태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특별하다. 실체와 언어 사이의 괴리를 회화언어로서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공부, 급훈, 상장, 선생상, 학생상, 백수상, 정복자상과 같이 학교제도와 얽혀져 있는 여러 관념들을 대표하고 있는 각각의 상들은 언듯 코믹하게 보이지만, 전체적 분위기는 어둡고 묵시적이다. 그 피상적인 관념들의 상들은 마치 들판 위의 낡은 집처럼, 오래된 유령탑처럼 생명 없이 존재하는 것들 특유의 서늘한 느낌을 안겨준다. 이러한 이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실체 없는 허상으로 서 있는 상아탑에 대해 다시금 명료하고도 육중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현실입니까?”.

이은주 / 독립 큐레이터


 

 



UNMONUMENT-SINCE 2008
非기념비

이재훈(LEE JAE HOON)

사회라는 커다란 숲은 소통이라는 인간의 교류-새로운 지식, 정보, 감정의 습득-를 통해서 자라왔고, 바꿔 말하면 이 집합체는 삶이라는 인간의 영역을 소통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성장해 왔고, 나 외의 것과의 사이를 조화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더욱더 발전 되어왔고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는 일정한 관념들이 존재한다. 이 관념들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가치를 지닌 이상향 또는 어떠한 부류, 혹은 어떠한 명사적 가치를 지닌 title 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념들은 일정한 이상적인 행위, 생각들을 유발시키며 이러한 행동과 생각들은 각각의 관념들의 이상적인 목표가 된다.
그로부터 사회적 통념이라는 상식의 선에서 그 행위들은 진실이 되거나 올바른 것이 된다.
가령 사회로부터 아름다운에 대한 관념들, 참된 것과 그른 것 혹은 가족, 선생님, 학생, 직업적 명사, 혹은 인간의 행위적 특성에 따른 사회적 title....등 개념에 대한 일정한 행위가 결정지어진다.
즉 인간 고유의 가치 그리고, 다변적인 개념 등을 인간 스스로가 규정지으며 그 외적인 것들과 구분짓는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소통의 구조인 사회가 이러한 관념의 부여와 동시에 그 행위까지 요구함으로써 그 외적인 것은 거짓된 것, 잘못된 것이 되고 그로인해 소통의 단절을 야기 시킬 수 있으며 사회를 위해 인위적으로 소통의 단절을 초래하고 위장된 소통을 생산하게 된다.
Un-monument는 이렇게 고정된 이상화된 사회적 관념을 기념비적인 형식으로 조형화시킴으로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단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이다.

‘관념에서 주어지는 이상향이 현실에서 똑같이 진실, 참이 되는 것인가?’

기념비적 형식은 예술의 본질이 표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예술의 비명시적인 속성과 같이위의질문을 통해 비명시적으로 소통의 단절을 가져다 주는 관념을 깨기 위한 것으로써 역설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작품분석◎
소통의 방법론
UNMONUMENT 작품의 2가지의 논점은 1.GLOOMY GENERATION을 통한 단어적 개념. 2. 제목의 형식(a title) 이다.

1.GLOOMY GENERATION를 통한 단어적 개념
현 사회 속에서 요구되어지는 더욱 더 인간을 규정하는 단어, 그리고 관념들은 늘어가고 있으며 인간 고유의 name(이름)외에 많은 title을 사회로부터 부여받고 규정지어진다. 그렇다면 인간본연의 title은 무엇인가?
본인이 말하는 GLOOMY GENERATION 은 이러한 단어들이 지닌 의미들과 같은 부류의 단어가 아니다. 인간에게 규정되어지는 title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title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회의적인 의미가 내포된 단어이다. 즉 명칭되어진 부류가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규정짓는 이와 규정되어지는 이가 불분명한 익명성과 사회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본연의 행위보다 그 타이틀에 걸맞는 행위까지 부여 받음으로써 계층적 소통의 격화를 만들고 있는 사회구조와 평등한 기회부여라는 현사회적 이상구조 간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일종의 변화된 계급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단어는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즉 각인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사회적 규범처럼 약속되어진 title인 것이다. 우리는 많은 title을 우리이마에 각인시키고 살아간다. 본인은 이러한 이름외의 이름, 부여되어진 title을 작품 속에 던져 놓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더불어 이러한 의미를 함축시켜 놓기 위해서이다. 조형적으로도 그러한 내용으로 눈을 가린 형태와 한 쪽 눈을 감고 있는 형태로 조형화 시켰다. 이는 고정된 관념으로 단어 역시 이미지이기 때문에 관객마다 다른 이미지의 연상을 도출하게 됨으로써 해석의 선택권을 스스로가 가지게 되는 권리라 할 수 있다.

2. 제목의 형식(a title)
본인의 작품의 제목은 항상 질문의 형식을 띤다. 이는 개인의 의식으로 예술 소통에 있어서 소통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작품에서 제시하고자 한 것은 소통의 간극을 그 의식의 중심점에 놓고자 하는 본인의 의도가 작품에서 소통의 문제가 생겨진다면 난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의 형식은 제목이 지니는 함축성과 주제의 지향성이며 제목(a title)은 해석의 방향이다. 일반적 제목은 관객과의 해석의 연결점으로 제목 자체가 화가에게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작품의 구조화를 통해서 화가가 의도한 바를 함축하게 된다. 일반적 제목은 화가가 관객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질문의 형식이라는 것은 성찰적 행위로써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갖는 것이다. 이는 철학함을 통한 일종의 깨달음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의 또 다른 해답의 keyword를 제시하고 작가가 의도한 바는 작가의 해답일 뿐이기 때문에 관객이 스스로의 해답을 스스로가 작품을 통해서 찾길 바라기 때문이다. 규정된 타이틀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인간가치의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이다.(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것은 이러한 자아성찰적 행위로 구별되기 때문) 즉, 질문의 형식은 주관적 이미지를 열린 텍스트로 바꿔 주며 강요된 텍스트가 아니라 선택적인 텍스트란 점이다.
이는 작품을 통한 열린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소통의 간극을 줄이고 감상자와의 거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이라는 작은 숲의 모습을 통해 사회라는 큰 숲의 소통의 간극과 의미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감상자가 스스로 인식하고 그 해답을 얻는데 있다. 즉, 본인의 작품은 강요되어진 주관적 조형이미지가 아닌 다의적 형태로 해석 가능한 열린 텍스트를 만드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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