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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패러독스 : 실재와 환영에 관한 질문들


캔버스를 스크린 삼아 이미지 하나를 프로젝션 한다. 이 이미지는 장소적, 시대적 특정성이 없는 상투적인 한 장면일 뿐이다. 작가 송은영은 이렇듯 진부한 이미지를 '원본' 삼아 캔버스 위에 밑그림을 그린다. 충실히 원본을 모방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주제-없는-그림’을 채워주고 있는 사물들의 원근법 논리는 조금씩 틀어지거나 부서져있다. 단번에 주제를 발견하기 힘든 송은영의 <침범하는 Invading> 연작의 화두는 착시현상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그림 그리기를 이용하지만, 원근법의 본질인 질서와 배치의 미학에 따라 위상이 결정되는 회화적 관습과 권위를 낯설게 하는데 있다.
매우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 그러나 이 그림은 극사실주의적인 묘사에 집중하지도 않고, 스펙터클한 역동성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작가는 '본다'라는 행위와 회화라는 시각매체 사이에 존재하는 관습화된 시각원리의 모순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모순은 회화의 토대를 되짚어보는 자세로서 회화적 '재현'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재현에 대한 고민은 2004년의 개인전 <따라잡기/끼어들기>에서도 과감하게 시도되었는데, 작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따라잡으면서(따라 그리면서) '지금'이란 시간을 포착하려는 무모한 드로잉 작업에 매진했다. 보는 자신과 보이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없애려는 이 실험은 결국 시간의 모호함만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자신의 이미지를 쫓을 때나 침범 연작을 위해 밑그림을 그릴 때, 송은영은 시각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촉각을 이용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재현의 고민을 풀어내는 작업과정에서 발견되는 이런 반-시각적(anti-optical) 태도는 그녀만의 불확정적인 회화적 지평을 여는 또 다른 단서일 것이다.

모순
<#7-오렌지 쿠션>이란 작품을 살펴보면, 삶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가구들이 배치된 개성 없는 거실의 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의 원본은 영화의 한 장면이기 때문에 작가의 눈에 의한 해석이 아닌 카메라의 눈으로 번역된 원근법의 원리로 만들어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파에 의해 가려져야 할 하얀 창틀이 소파의 일부를 잘라내듯 침범한 상태, 안과 밖의 구분이나 논리는 부분적으로 파괴된 상태이다. 근본적으로 송은영의 회화는 원근법의 원리를 아카데믹하게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재현의 법칙은 부분적으로 어긋나있다. 서구의 전통적인 원근법은 사물의 중요도에 따라나름의 질서를 부여하여 화면에 배치하는 회화적으로 해석된 보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실제의 부피와 면적을 거리에 따라 축소하거나 과장한다. 이런 질서 안에서의 사물들은 그 자체가 아닌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참조의 대상일 뿐이다. 작가는 이런 회화의 질서에 의해 존재감이퇴색된 사물들은 ‘존재의 무게’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런 생각은 원근법적 구도가 부분적으로 어긋나있는 <침범하는> 연작을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는 체계를 교란시키면서 표출되었다. 다시 말해, 질서가 잡힌 공간에 ‘침범’한 이질적인 요소(무너진 원근법)에 의해 회화적 균형이 흐트러지고 작품의 주제가 오히려 ‘사물들’로 전치되는 역설적인 광경을 제시한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에 따르면, 홀바인(H. Holbein)의 <대사들 (Ambassadors)> 안에 '침입'한 해골의 왜상(anamorphic perspective)이 당시 지배적이었던회화의 규칙적 배치를 붕괴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붕괴는 회화의 의미를 발생시키는데 결정적 요인이었는데, 실재를 암시하는 권위적인 사물 이미지는 결국 공허한 욕망으로 사라져버리고, 환영처럼 여겨졌던 왜상은 바로 우리의 삶과 죽음에 있다는 진리를 암시하는 극적 장치였다. <대사들>은 이처럼 두 부류의 사물을 대립시키고 해골의 왜상이 제도화된 화면에 침범하면서, 회화의 의미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알레고리의 미학을 재현하고 있다. 송은영의 침입 또한 규범화된 회화의 전형을 답습하면서도 동시에 이 전형과 대립하는 왜곡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개입시켜관습화된 '보기'에 물음을 던진다.

사물의 반란
송은영의 회화는 사실주의적 재현의 틀을 차용하고 있는데, 침범 연작에 소개되는 작업의 대상들을 우리는 모두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침대, 이불, 옷장, 의자, 테이블, 소파, 창틀 등 그녀의 그림 속 이미지는 이해 가능한 사물들이 재현되어있다. 관객들은 이 그림 앞에서 과연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작업 간의 연관을 맺으면서 어떤 내러티브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작가는 이야기 그림이 아닌 그림, 그림 속의 다양한 대상들을 주목했다. 어떻게 보면 그림-꼴라쥬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침범하는>은 사물이 회화의 주제이다.

전형적인 살롱화처럼 보이는 화면구성과 장소는 물론이고, 무관심한 듯한 화가의 팔레트는 회화를 하나의 기호나 언어로 '읽어가려는' 관객들을 당혹하게 만들 수도 있다. 회화를 언어로 읽을 수 있을지에 관한 논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송은영의 그림들은 읽기보다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전체보다 오히려 디테일을 찾아 그림 안에서의 배회를 통해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메를로-퐁티(Merleau-Ponty)가 언급한 세잔을 살펴보자. 그는 세잔의 그림을 관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대신 관객의 시선이 그림 안을 산책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에 따르면, 회화란 세계와 나 사이의 경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송은영의 작가적 고민은 규격화된 보는 방법을 구조적으로 해체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미학적 실험을 연상케 한다. 영국 화가 줄리언 벨(Julian Bell)은 그의 저서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프랑스 철학자 리요타르(Jean-Francois Lyotard)에 따르면, 세잔 이후에 화가들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게 할 수 있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 고심”하였다고 설명하는데, 당시 예술의 고민은 추상/구상 또는 평면/입체와 같은 이분법적 대립이 아닌 시각을 통해 과연 '실재'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회화로 실재를 보게 할 수 있을 것인가로 이행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시선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는 행위와 회화적 재현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실재의 세계와 그것을 재현한 회화적 세계 역시 동일한 세계일 수 없다. 우리가 믿는 실재와 달리 대부분의 삶은 환영이 지배한다. 미래의 청사진, 유토피아의 꿈, 욕망은 실재가 아닌 환영에 가까운 비가시적인 세계이니까. 사실 시각이란 생물학적 감각보다는 문명적 환경에 지배되는 감각이며, 고전적 의미로서의 회화는 이런 제도화된 시각의 결과물일 것이다.

20세기의 미술은 무엇보다 전형화 된 논리의 미술로부터 이탈하려는 의지로 충만한 실험의 시대였으며, 그래서 예술의 종말론이 대두되는 극단적 변혁을 겪어야만 했다. 극단적 담론의 영향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본다는 지각행위와 미술의 연관성은 진부한 또는 불필요한 질문이 되어버린 듯하다. 과연 그럴까? 이 질문의 비유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말을 떠올려본다. 그는 시의 언어는 새로운 의미의 생성이 아닌 사라진 원래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현대회화 역시 '본다'는 행위와 '재현'한다는 매체적 한계를 되묻는 것은 이미지의 시원을 탐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송은영은 고집스럽게 '이미지'를 탐구하는 작가다. 작가적 궤적을 살펴볼 때 이런 고집은 그림과 사진을 충돌시키는 매체적 실험으로 드러났으며, 움직임과 멈춤과 같은 실존적인 물음까지 펼쳐져 있다. 4년 만에 열리는 <침범하는>에서도 일련의 작가적 고민은 여전하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원근법의 해체와 주제의 이산(dissemination)을 통해 과거 사진과 회화를 혼재시키면서 시각적 모순을 극단적으로 제시했던 과감한 시도와는 달리 온전히 회화로 회귀하면서 회화의 토대인 '본다'는 의미의 자율성을 탐구하고 있다.


정현 / 미술비평




송은영

<침범하는>

이 유화 작품들은 일루젼과 존재, 그리고 기억의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실내풍경은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그 안의 사물들은 원근법적 거리에 상관없이 서로의 외곽선을 ‘침범’하고 있다. 이는 사물들이 사실적으로 재현되었지만, 동시에 이것들이 존재의 무게를 갖지 않는 환영이라는 숨겨진 아이러니를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여기에서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사물들은 원근법 질서로 정해진 외곽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지만, 이를 보는 관객의 기억에 의해 ‘침범당한’ 사물들은 다시 온전하게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물과 풍경들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 그 반응의 원칙은 바라보는 이의 지각과 기억이 원근법과 뒤섞여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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