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ve

검색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큰 키에 서글서글한 표정, 글래머러스한 외모의 차혜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겉모습과 달리 나긋나긋 여성스럽게 말하고 수줍게 웃는 그녀의 전혀 다른 모습에서 외연-내포의 불일치, 즉 ‘이중’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1차 (시각)정보를 비껴가는 후차 정보의 배신이 차혜림 작품의 미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이란 잔혹극을 주장한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의 저서 ‘연극과 그 이중(Theatre and it's Double) ’에서의 중심개념 ‘이중’을 말한다.

아르토의 저서에서 ‘이중’의 개념이란 매우 은유적이어서 명쾌하지 않지만, 더러운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 수면위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두움, 시작과 끝이 ‘한 몸에 붙어있는’ 어떤 것으로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다. ‘이중’은 잔혹성(Cruelty) 연극의 당위성을 주장한 아르토의 잔혹극 이론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차혜림의 그림에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실(또는 눈썹 시술실)에서 머리통이 흘러내리고 몸이 찢겨진다. 그것들은 다른 작품에서, 선풍기 날개의 바람을 타고 다른 형상으로 어디론가 휘날리고 있고, 머리통에선 근육이 돌출하며, 다시 선풍기에선 여러 개의 머리들이 생성되는 식으로 표현된다. 작가 차혜림의 외모에 비해 언행이 예측을 어긋나는 불일치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차혜림의 한 몸속에 붙어있어 차혜림을 구성하고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듯, 그녀의 그림속의 형상과 상황들도 온통 이중적인 것과 불일치의 모습으로 꾸물꾸물 이야기를 흘러내 보인다. <표본실의 환영>이라는 작품에서 인물은 과학 실험실 같은 이성적인 공간을 내려다보는 주체이자 자신의 몸이 탈장되고 찢겨나간 실험대상의 피주체적 모습을 동시에 갖는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인물들은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되는 이중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남성의 근육과 여성의 가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며 앙토냉 아르토의 또 다른 키워드 ‘페스트’를 지나가듯 언급한다. 대학로 연극계의 전문가들도 얘기가 나오면 손을 내저을 정도로 난해하고 모호하기로 유명한 전위적 연극이론가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성’ 미학을 대번에 이해하고 있는 차혜림의 직관은 놀랍다. 중세유럽을 죽음의 공포 속에 빠뜨린 페스트(흑사병)의 병리현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페스트 같은 연극’ 을 주장한 아르토가 주목한 것이 바로 페스트의 잠자고 있는 이미지들과 잠재적 무질서 상태였으며, 존재와 비존재, 잠재성과 물질화 사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사뭇 난해한 예술 창작법 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유사한 관심을 갖고 있던 차혜림이 우연치 않게 읽게 된 아르토 이론을 머리가 아니라 직관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그림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만일 머리로 이해하고 그렸다면 질병, 죽음, 피, 병균, 고통 따위가 외연적으로 그려졌을 터, 이처럼 국내의 많은 젊은 작가들의 회화가 외연적 이해와 상징적 연결에 머무는 도식적 표현을 보여주는 반면, 차혜림은 탈장된 몸이라는 극단과 현실적 공간장치를 병치하여 창의적으로 그것을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꾼 꿈에서 시작되었다는 한 작품은 사람머리 같은 형상의 볼링공을 던지고 있는 인물과 사람머리에서 뼈가 나와서 머리털->음모->뼈다귀로 디졸브 되고 있고 다시 음모에서 여성의 몸속에 들어앉은 볼링볼과 볼링핀 머리의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볼링 하는 사람이 몸속에 들어와서 인관관계가 그렇듯 서로서로 밀쳐내는 꿈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작품들 속에 스포츠를 하고 있는 운동선수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작가는 털어놓는다.

유방이 두 개의 아이스크림으로 표현된 인체와 헬쓰운동 하는 인체, 목운동 하는 기구를 쓴 상태로 고문당하는 사람, 길거리 탁구대회중인 말머리의 인물 등 반복해서 등장하는 차혜림의 인물들은 인물의 표정이나 구체적 외모는 뭉그러진 대신 고고학 박물관, 표본실 같은 박제된 공간이나 길거리 탁구장, 미용실, 눈썹 시술실 같은 사람의 몸이 권력화 된 닫힌 공간속에서 성이 불분명한 신체가 왜곡되고 전이된 운동선수의 형상으로 재탄생한다. 모호하게 왜곡된 운동선수들은 그림 속에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 그것들은 비선형적 공간의 하이퍼텍스트 형상을 이루는 그림속의 장치 또는 공간들과 상호작용을 하는데 여기에 작가는 수수께끼처럼 해결의 실마리로 보이는 단서들을 배치시켜놓았다. 이를테면 고고학 박물관이나 눈썹 시술실 같은 공간에 갇힌 운동선수들은 구속되는 인물인 동시에 탈출도 가능케 한 작가의 실마리를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구속되는 동시에 탈출 가능함, 상황을 보고 있는 동시에 당하고 있는 나 등의 이형동체들은 작가가 배치한 구체적 공간속에서 어떤 운동을 통해 수수께끼적 상황을 만들어 간다. 그림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작가의 말대로 ‘미분화된 언어’로 나타난 몸의 이미지의 운동을 통해 ‘몸이 언어를 만드는’ 과정을 이해하고 작품속의 비선형적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웅동체의 운동선수, 추한뿌리를 가진 아름다운 연꽃같은 이형동체와 충돌하는 박제된 공간이라는 이중, 삼중의 이미지들의 운동 속에서 작가가 던져놓은 소소한(그나마도 모호한) 단서들로 이성적인 독해를 시도한다면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은 이성적 언어보다는 ‘미분화된 언어’ 이를테면, 괴성, 흐느낌, 비명, 교성 같은 것에 가까울 것이며, 어쩌면 교성과 흐느낌이 같이 융합 되어 있어서 ‘해체 불가능한’ 어떤 것에 더욱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차혜림의 그림이 말하는 언어는 실로 언어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 빅뱅이 시작하기 전 카오스의 우주처럼 분리 되지 않은 합체의 그것으로서 뇌세포와 생각처럼 도저히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찢겨지고 탈장된 몸이 권력화 된 불가항력적 장소와 만난 최악의 상황에서 이성적 언어로 치환될 수 없는 새로운 운동이 발현된다. 그것은 작가가 언급하듯 초극적 인간을 말하는 니체의 ‘위버멘쉬(Uebermensch)’일수도, 앙토냉 아르토가 페스트의 병리에서 찾은 잔혹성의 미학과 일맥상통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나 아르토를 떠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요즘처럼 콜렉터의 코드에 부응하는 젊은 작가들의 팬시한 작품들과 선정적 작품이 난무하는 가운데 모처럼 20대 작가의 회화에서 진정성을 바탕으로 ‘끝까지 밀어 붙인’ 극단성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닌게 아니라 차혜림의 극단성과 이중성은 작가의 습작들에서 나타난 ‘직선 긋기’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그의 습작 드로잉에서 그려진 기하학적 직선들이 사실은 모두 자를 대지 않고 ‘프리핸드’로 그려졌다는 흥미로운 지점인데 , 이것들은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을 투자한 산물임에도 결과는 자를 대고 그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드러난다.


자를 대고 그은 직선과 거의 달라 보이지 않을 직선을 몇 시간이고 책상에 앉아 붓으로 꼼꼼히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결국 장시간 몸의 운동과 구속을 통해 생산된 그것은 직선이지만 직선이 아니며, 직선이 아니지만 직선이다.

홍성민 / 작가,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여러분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세요? 작가정보 페이지 이동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댓글(1)

현재 0byte/ 최대 500 byte

등록
dltmdrl 참으로 독특하네요... 2010.10.29 15:46:07

Quick Pag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