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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는다는 것이다."
- 폴 발레리(Paul Valéry)
 
존재한다는 것은, 내 눈 앞의 것들과 끊임 없이 소통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순간,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인식과 선입견, 지식 등은 구체적인 경험의 기억으로 변화하게 된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폴 발레리가 말한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내가 본다는 행동을 하기 이전에 이성의 영역에 있던 관념들을 ‘보다’라는 소통의 과정을 거쳐 상처나 추억과 같은 내재화된 감성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라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멸과 생성, 그리고 감정의 개입 등은 김승영의 작품에 개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김승영의 작품들은 대부분 명상적인 분위기와 세련된 형식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그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몇 가지 요소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김승영의 작품이 가진 가장 주요한 형식적 특징으로 세 가지 정도를 거론할 수 있겠다.
공간에 놓여진 작품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빈 공간의 환기된 분위기가 적절히 혼재되어 생명력을 부여 받은 환경을 구축해왔다는 것은 김승영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작품이 놓여진 공간의 에너지를 관객으로 하여금 충분히 호흡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형식적 지향점과 공간 해석의 스케일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깊은 생각을 유도하게 만들곤 했다. 작품 속의 일정한 공간에는 내부로 관객이 들어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관객이 (적극적인 참여든, 어색한 머뭇거림이든) 함께 존재할 때 온전히 성립하게 되는 것들이다.
김승영작품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형식적인 특징은 반복의 미학이다. 낙엽이나 빈 책장, 자신의 얼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 등 각 작품에 존재하는 개체들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어 어떠한 집적(集積)의 형태를 이루며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 지리멸렬한 반복의 연속이라는 감상적 체험의 결과를 보여줌과 동시에 시간이나 사물을 관조하고 해석하는 작가적 사고가 상당히 다차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형식미는 대개 목재나 낙엽, 물 등의 자연물을 이용한 재료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물은 상당수의 김승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한 재료이다. 그는1980년대 후반에 처음으로 물을 작품의 재료로 쓰기 시작했는데, ‘작업을 하면 할 수록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젊은 김승영에게 최소한의 환경만을 조성해주면 미세한 감각까지 구현해 내는 물이라는 재료의 발견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자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건 스스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유기체로서, 물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매우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고여있는 물이 반영하는 공간, 낙수(落水)가 표면에 만들어내는 물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리와 흔들리는 영상 등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요소이다.
 
김승영이 작업을 통해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소통’과 ‘기억’에 관한 것이다. 김승영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신앙에서 비롯된 도덕적인 결벽증으로 인하여 자기 비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스스로 받은 상처와 열등감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기보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고, 이는 성장기의 김승영에게 트라우마였다. 원활하지 않은 소통에 대한 절망과 받아들이기 힘든 상처의 기억들은 김승영의 감수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한동안 그의 작업은 어두운 심상에 대한 투쟁과 내적 트라우마의 치유의 방편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1999년 원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할 당시, 가까운 두 명의 지인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 김승영은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그 위를 흰색으로 덮어 버리는 작업을 시도했다. 칠하면 드러나고, 그 위를 다시 칠하면 또 드러나는 얼굴은 결국 희미한 흔적으로 남게 되었고, 그는 그 결과물을 전시했다. 완전히 지우고 싶은 기억들도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덮어 버리는 것일 뿐이며, 결국 흔적이 되어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경 뉴욕의P.S.1 레지던스 프로그램에1년간 참여한 김승영은 언어와 관습의 장벽으로부터 느껴지는 고립감과 지극히 제한적인 소통의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외부와의 단절로 인한 여파는 자신의 내적 정체성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적극적인 소통에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인 위축은, 후에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안경 쓴 눈만 동그랗게 남긴 채 잔뜩 위축되어 돌돌 말려있는 형상으로 재현한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이 때의 기억은2007년 겨울에 발표한 ‘세상의 꽃’이라는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최근 작가교류프로그램으로 몽골에서 체류를 했던 김승영은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편안한 소통을 즐겼고, 후각이 결합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고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이는 십 수 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그가 구축해 놓은 소통의 방법론이 가져온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김승영은 오브제와 물, 그리고 벽돌 위에 붙인 수많은 이름들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 ‘흔적’(2008)과 싱글채널 영상작품 ‘기억’(2008)을 출품하였다. ‘흔적’은 공간화랑 전체 면적에 걸쳐 배치된 장소특정적 설치작품이다. 전시장의 천정에 매달린 오브제는 마이미스트들이 언어를 배제하고 종이로 행위로 소통을 시도하며 연출을 구상하던 자리에 김승영이 우연히 참여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다. 그는 몇 명의 사람을 모아 넓은 종이를 매개로 한 자유로운 행위로 서로에게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자신과 상대방의 더듬이를 맞대고 비비는 행위로 서로의 기억을 교환하는 개미들의 소통을 연상하게 하는 이 행위의 결과로 김승영은 소통의 흔적이 남은 종이들을 얻게 된다. 그것들을 이어 붙여 커다란 오브제 형태로 만들어서 전시장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그는 우연성에 기초한 소통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오브제 아래에 언뜻 심연(深淵)처럼 자리 잡은 물은 오브제와 그 배경을 은은하게 반영하고 있다. 위쪽에 있는 유리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변하면서 매 시간 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반영하는 물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공간의 차원을 확장시킨다.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소통을 하게 함으로써 진지한 사고의 모멘텀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그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비친 영상에 잔잔한 파문(波紋)을 만들어낸다.
전시장의 입구부터 내부 깊은 곳까지, 수많은 이름들이 박혀 있다. 작가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기억 속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름을 공간화랑의 내부에 있는 각각의 벽돌 위에 투명한 글씨로 붙여 놓은 것들이다. 긴 시간의 흔적이 드러나는 벽돌 위의 이름들은 어떤 것은 선명하게, 어떤 것은 오랜 시간 벽돌과 함께 닳고 지워진 듯 존재하는데, 마치 여러 차원들의 시간이 남긴 흔적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다. 차원의 통로를 부유하는 기억의 편린들을 은은하게 재현해 놓은 이 이름들을 김승영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로 읽을 수 있다면, 이 소우주의 흔적 속에 존재하게 된 관객은 그 흔적들로부터 궤도가 다른 자신만의 소우주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각자의 소우주들이 서로 얽히고 겹쳐져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한 순간이 우주의 삼라만상과 맞닿아 있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가르침을 상기하게 한다.

소극장 공간사랑에는 영상작품 ‘기억’(2008)이 상영되고 있다. 화면은 깔끔한 스크린이 아니라 투박한 벽돌 면 위에 투사되는데, 자신의 윤곽이 그림자처럼 드리운 벽면 위에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름들이 장식적인 요소 없이 그저 지나간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감도는 적막한 분위기도 있지만, 작곡가 오윤석이 작업한 서정적인 음악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차분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으로 이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니체의 ‘자기 변혁을 통한 초인화의 과정’을 미술의 치유적인 과정과 연결시키며 아방가르드 미술의 정신적 기원을 분석한 사람으로 미국의 미술비평가 도널드 쿠스핏(Donald Kuspit)이 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초월성에 의한 의지가 예술작품의 치유적 속성을 긍정하고, 자발성과 종합성, 변화에의 의지, 현실과 예술적 감수성의 조화 같은 미학적 균형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서정성과 명상적 분위기를 추구하는 형식미, 기억과 소통과 같은 정신적 요소를 일관되게 지향하는 김승영의 작가적 정체성에서 동시대 대중이 열광하는 자극적, 물신적 트렌드를 찾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예술을 수단으로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추구하는 천박성’ 대신에 예술의 치유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예술론으로 무장한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충만한 의지와 함께, 동시대의 병리적 현상에 대한 깊은 감정이입과 실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고원석/공간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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