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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벽인 줄 몰랐어요.
사위를 뒤덮은 그 어둠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했죠.
- 한동림 ,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새벽 새』


불투명 / 투명
일정한 프레임을 뒤덮는 하나가 있다. 그 위에 다른 하나가 놓인다. 그리고 또 하나가 놓인다. 쌓이고, 또 쌓이고, 또 쌓인다. 당연지사 이러한 과정에서 프레임은 불투명한 막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홍수연 작업은 ‘텅 빈 캔버스’위에 무수한 것을 쌓으면서 시작한다. 녹녹치 않은 시간, 노동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물감의 양이 빈 캔버스에 여과 없이 투사된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연이건 필연이건 텅 빈 캔버스는 점차 불투명한 막으로 변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홍수연의 화면은 여전히 투명하다. 마치 투명한 물이 아무리 쌓인다 해도 여전히 최초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시간이 있고, 노동이 있고, 물감이 있다. 그렇다면 왜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화면을 투명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화면의 불투명 혹은 투명은 어떤 의미인가?
불투명은 최종 상태를 보여준다. 바로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그 아래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는 관심 밖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 인가이다. 그러나 투명은 최종 상태뿐만 아니라 최초의 상태, 더 나아가 최종과 최초 사이의 간극을 모두 보여준다. 앞서 예를 든 물에서 알 수 있듯, 투명은 그 최초의 상태가 보이고 동시에 표면도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굴절과 왜곡 역시 목도(目睹)할 수 있다.
홍수연의 작업은 화면 전체가 단색으로 이뤄져 있다. 화면은 단색으로 균질하며,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이 그의 작업을 불투명성으로 규정하고 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균질한 틈을 헤집고 들어와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놓는 낯선 형태(와 색)가 있다. 불투명한 표면에 안착한 그들은 정박한 것이 아니라 부유하듯 표면을 미끄러지면서 종국에는 불투명한 내부로 침투한다. 불투명하게 보이던 표면은 이러한 낯선 존재를 통해 그 층이 드러나면서 투명해진다.

투명에 생성된 ‘층들’
불투명한 표면이 실상은 투명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밝히는 과정에서 투명한 것의 가려진 층이 드러난다는 것. 그것은 홍수연이 방점을 두는 곳이 화면을 장악한 색이 아닌 층과 층이 맺는 ‘층들’의 관계(때로는 충돌하며, 때로는 미끄러지며, 때로는 접합하는)라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예로 시작해보자. 시간과 시간 사이에 분이 놓이고, 분과 분 사이에 초가 놓인다. 이러한 규격화된 틀을 통해 하루를 살고, 일 년을 살고, 평생을 산다. 생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도 역시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산하기 좋은 단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분절된 세상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근본 방식이다. 물론 생은 연속체이지 분절체가 아니다. 시간의 최소 단위라 생각하는 초와 초 사이에도 우리는 생을 지탱한다. 우리가 지워버렸거나, 혹은 망각해버린 그 지점 역시 생을 지속하고자 하는 운동은 지속한다. 그렇다면 분절과 분절 사이, 즉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아니면 지워버렸거나, 망각해버린) 그 지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단순한 예에서 시작했지만, 질문은 복잡해졌다.
홍수연 작품에 안착 되어 있는 대상들은 어떤 뚜렷한 형태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프레임 가득 메운 단색면이 우선 포착된다. 단색면이 뿜어내는 적막(寂寞)에 잠식될 때쯤, 그 고요를 흔드는 미세한 떨림이 포착된다. 어떠한 형태를 보이고 있지 않기에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부를 수 없는 그 무언가는 응결된 이미지로 보이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자신의 잔상을 보인다. 이미지의 윤곽은 고착되지 않고 분절과 분절 사이 미지의 순간으로 미끄러진다. 귀결점 없이 지속적으로 미끄러진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즉흥성과 우연성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연의 작업방식은 오히려 그 반대로 향한다. 오히려 철저한 계산과 의도로 진행된다. 계산된 캔버스의 기울기, 아래층을 위층에 부유하게 하고 그 층이 또 다른 층에 부유하도록 조절된 물감의 양이 만들어내는 투명성. 그리고 이를 통해 획득되는 시간성.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하나의 층이 하나의 형태이면서 다음 형태의 잔상으로 존재한다. 일견 이러한 구조는 또 다른 형태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층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화면 전체가 천천히 진화하는 유동적 이미지로 인식된다. 최소 단위로 분절시켜 그것을 규정하려 하여도, 그것은 또 다시 다른 지점을 향해 진화한다. 중첩과 겹침, 드러냄과 숨김, 즉 ‘층’ 이 아닌 ‘층들’을 통해 의미가 획득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층들’이 놓이는 위치이다. ‘층들’ 주변에는 넓은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 이것은 ‘층들’이 특정 위치에 정박한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렇다고 무한하게 확장되지는 않는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삶은 연속체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는 층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법을 학습했고, 층과 층을 구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연속체를 사고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분절점을 찾아 그것을 논리에 맞게 재구성했다. 그러면서 분절점과 분절점 사이를 희생시켰다. 그러나 홍수연은 그 지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복원한다. 그의 색면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변화하는 대상들도 너무 천천히 변하고 있기에 전체적으로는 적막하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우리의 삶이라는 것 역시 거대한 또는 중요한 분절점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거기에는 그간 우리가 잠시 잊었던 사소하고 느릿한 변화들로 가득하다. 홍수연은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해져 있던 것들이 낯설게 보이지 않는가. 층으로만 인식했던 것에서 그곳이 실상은 투명막의 생으로 존재한다. 적막으로 가득했던 공간을 깰 수 있는 그들의 활발한 웃음과 ‘층들’이 만들어 놓은 충돌의 소리에 관심을 둬보자. 이제 여기에 귀를 기울이자.

이대범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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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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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om 전시설명을 보니 깊은 의미가 있군요. 예술은 참 어려우면서도 매력있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그림 멋집니다!!! 2010.09.30 13:47:07
slrzns 정말 보고 싶은 홍수연 작가님의 전시 입니다. 2010.09.28 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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