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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지구의 초상이자 인간의 얼굴이다. 기호와 약호로 구성되는 지도는 세계를 축소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가를 일러준다. 지도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사실에 바탕을 둔 거짓말이며 근본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이제 상투적 비유가 되어버린 보르헤스의 소설에서처럼 땅의 실제 크기와 같은 지도가 등장하는 것이리라.
최근의 디지털 지도, 네비게이션, 구글, GPS, GIS 따위의 용어들은 역사적으로 변화해온 지도의 최신 버전이다. 인간이 발로 걸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지도를 그리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가버렸다. 사진, 과학 장비, 디지털로 제작된 지도의 시간은 과거의 지도처럼 불변의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며 심지어는 실시간화 되었다. 지도의 공간 또한 그러하다. 전통적인 지도에서 시간과 공간은 일체가 되어 시간과 공간의 누적을 보여주지만 디지털 지도는 공간과 시간을 분리해버린다. 구글 어스처럼 인공위성으로 촬영된 사진의 누적인 지도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집합이다. 즉 한 장의 통일 된 지도가 아닌 것이다.
근현대 지도에 이르기 전 지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화와 지리적 정보 사이에 위치했다. 지도는 적절한 정도의 상상력과 소문과 실제의 결합이었으며 때로는 현실을 무시한 공상이기도 했다. 근현대 이전의 지도들이 가지는 매력은 그것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 교묘하게 자리 잡고 회화와 지리학과 관념들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보민의 최근 작업들도 바로 그러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김보민은 자신이 고지도에 대한 본격적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원서동 탐사 작업에서 부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관심은 강희언의 그림 ‘인왕산도’에 쓴 강세황의 찬문을 보고 더 커졌다고 한다.
강세황의 찬문에는 ‘진경을 그리는 사람은 매번 지도와 닮을까 걱정하지만 이 그림은 십분 진경에 가깝게 그렸으면서도 또한 화가로서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 는 구절이 있다. 지도와 유사하면서 지도가 아닌, 그러니까 실경이면서 동시에 지도는 아니고 회화적인 품격과 즐거움이 있는 그림이 김보민이 원했던 작업이었다.
실경의 전통과 당대성 그리고 개인적인 해석을 아울러 보겠다는 시도인 것이다. 이 시도를 위해 김보민은 지금 까지 해오던 작업의 일부를 변화 시킨다. 김보민의 이전 작업들은 전통 회화적 기법으로 그려진 산수와 현대적인 시각에서 그려진 건물과 사물들을 한 화면에 배치해 충돌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들은 대기 좌우로 긴 파노라마 화면이었으며, 때로는360도 시각이 구현되기도 했었다. 작업의 소재는 서울이었고, 늘 자신이 지나다니면서 보던 풍경들이었다. 김보민은 그 작업들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 서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연이고, 도시는 우리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다. 나는 불안정한 단편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구성하고자 노력하며, 현실과 가상 사이에 틈을 벌려 이 도시를 개별적 장소로 변모시킬 여지를 만들어 가려 한다. 풍경으로서 도시환경의 가치를 두고 전통회화의 방법론을 응용해 자기 방법과 매체로 일상의 ‘지금-여기’를 그리고 있다.” 라고.
지금-여기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려보겠다는 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김보민의 작업은 서울을 대상으로 하고, 그 장소들은 자신이 잘 아는 곳들이다. 묘법 역시 전통적인 실용적 그림인 계화(界畵) 기법과 유사한- 테이프 묘법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직선묘와 고전적 기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 시선과 인식에는 변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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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업에서 김보민은 고지도의 시각과 회화의 시각을 만나게 하기 위해 부감법을 일단 구사해본다. 그런 시각이 얼른 눈에 띄는 작업들은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일대를 그린 것이다. 물론 이 시점은 겸재의<금강전도(1734)>의 시점이기도 하고<동궐도(1830)>와 같은 궁궐 그림처럼 경관 전체를 조망할 필요가 있을 때 오래 전부터 상용되던 시점이다. 하지만<삼청도(2008)>는<동궐도>와 같이 설명과 안내를 위한 그림은 아니다.
김보민은 이 그림들을 그리기 위해 실제 지도와 현장답사와 상상력을 결합 시킨다. 그 결과 삼청동 일대는 경관은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빌딩들과 건물들이 들어선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시간의 층이 쌓여 누적된 풍경이다.
부감법으로 그려진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지도를 보는 태도와 그림을 보는 태도 둘 다를 요구한다. 지도로서의 그림은 그 안에 그려진 감사원, 헌법 재판소, 현대 사옥 따위의 건물들을 우리의 기억과 일치시켜 보도록 한다. 하지만 건물과 길을 제외한 산과 나무들은 『개자원화전』 등에 근거를 둔 전통회화를 보는 태도를 요구 한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이러한 태도는 북한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 볼 때 거의 필연적으로 주요 건물들의 위치를 찾아보면서 동시에 그 건물들이 없었던 시절의 한강, 남산, 관악산등을 상상하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즉 축척이나 방위는 부정확하고, 건물의 위치 생김새는 유사하고, 자연은 과거에 속하는 김보민의 이 작업들은 장소성이 사라진 서브토피아(subtopia)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의 경관이 가진 고통이자 즐거움인 것이다. 김보민이 충실하게 모든 것들을 지도에 그려 넣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북악산 아래 ‘청와대’는 없고 ‘정업원’과 같은 건물은 따로 그려진다. 청와대가 아니라 정업원이 의미 있는 장소인 것이 바로 김보민이 가진 인식의 지도이다. 정업원은 은퇴한 궁녀들이 노후에 머무르면서 현생의 업을 씻는 공간이다. 청와대처럼 업을 쌓는 것이 아니라 업을 씻는 공간이 의미 있는 것이다.
부감 시점은 한강의 밤섬, 여의도 등의 공간에서 계속된다. 여의도는 로울러에 밀린 듯이 납작하고 한강다리들은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밤섬 연작이다. 70년대 건설 공사로 파헤쳐져 사라졌다 다시 생긴 밤섬은 기이한 공간이다. 없어졌던 섬이 다시 생기는 일은 현실이면서도 일종의 환상이다. 김보민은 그 밤섬을 세 가지 시점에서 접근한다. 부감법, 밤섬에서 본다고 가정하는 시점, 강북강변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이다. 어쩌면 이 시점들이 김보민의 인식 지도 혹은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적나라한 흔적일 수 있다.
김보민이 서울을 묘사하기 위해 채택한 전통 묘법과 직선 테이프 묘법은 지도를 차용한 작업에서는 크게 충돌과 긴장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는 적절히 서로 견제하며 조화를 이룬다. 전통적인 것과 테이프 묘법으로 그려진 건물들의 충돌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은 샛강, 여의도, 청계천을 그린 작업들에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법 자체 보다 양자의 배분이 달라진데서 연유한다. 전작들이 전통적 풍경이 부수적이었다면 근작들에서는 그것이 역전된다. 그리고 그 역전 속에는 전통 그림에서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요소가 자주 드러난다.
여의도, 청계천을 묘사한 샛강 등의 그림에서 그것은 두드러진다. 과거의 작업들이 현재 풍경이 압도하는 속에서 빌딩들 사이로 간신히 고전적 풍경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면 최근 작업에서 전통적인 풍경은 현대적 풍경의 전면에 있다. 청계천과 여의도는 바로 그런 공간들이다. 전통 풍경은 청록산수를 연상 시키는 관념 산수 기법에 표현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빌딩과 배경 또한 환상성을 띠게 된다. 전작들이 현실적인 느낌을 거리를 두고 표현했다면 근작들은 그 긴장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무너뜨림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전시 제목처럼 자신이 표류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기록이 근작들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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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세계인식은 늘 불안하다. 세계는 끝없이 변화하며 유동적이고 인간을 안심시키지 않으며 더구나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이런 세계를 안정시키려는 방법 중의 하나가 세계를 고정된 이미지로 변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의 하나인 회화는 탁월한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원초적이고 육체적인 과정들을 통해 작가 스스로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안도감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현실과 구분지어 회화적 사실이라고 부른다.
김보민의 그림들은 바로 고지도의 시선을 빌어 불편하고 불안한 현재를 고정시키려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일단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 흥미는 김보민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이항적 화두들을 이질적, 자의적으로 구사해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로부터 환기 되는 힘을 키우려’ 한데서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김보민이 이질적으로 보는 전통 회화 기법과 지금의 서울은 둘 다 일종의 가상실재에 가깝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서울은 근본적으로 계획과, 전망과, 철학과,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뭔가를 짓고 만드는 일종의 거대한 가상이다. 이는 근래에 개조된 광화문 광장을 보면 된다. 디자인도, 심미성도, 철학도, 일관성도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동상부터 분수까지 어지럽게 설치해 놓고 잡다한 행사를 벌인다. 전통 회화 역시 방향은 다르지만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발생 기반이 거의 사라진 시대의 산물이며 영향력도 축소되었고, 그래서 그 부재를 감추기 위해 때로 과도한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니까 테이프 묘법으로 그려진 서울의 건물들과 전통 기법으로 묘사된 공간은 기이하게도 동일한 성격을 가진 일종의 가상실재의 집합인 것이다. 내부적으로 유사한 공간이 외견상으로는 이질적인 것처럼 서로 다른 얼굴로 만나기 때문에 그림 속의 기이한 긴장감이 발생되는 것은 아닐까? 김보민이 그리려한 지금-여기의 비밀이 아마도 이러한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김보민은 그렇게 길지 않은 회화적 이력 속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아왔다. 그것은 진지하고 성실한 제작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즉 철저한 사전 조사와 학습 치밀한 방법론이 작품들을 일정한 수준 위에 있게 하는 힘이다. 하지만 김보민의 시도는 안경화의 지적처럼 범법자가 될 정도의 강도는 아니고, 때로는 김학량의 말처럼 센티멘털리즘에서 멀리가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은 동시에 김보민의 강점이기도 하다. 개인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김보민의 작업들이 표현적 요소가 강해지고 감정적이 될 때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과장된 감정이입 없이 절제하는 태도가 김보민의 작품을 완성도 높은 치밀한 구성과 설득력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보태어 김보민의 작업이 가지는 그 구체성 또한 확실한 힘의 원천이다. 개나 고양이만 간간이 등장하는 김보민의 사람 없는 풍경이 일종의 서사성을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까지 김보민은 자신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하면서 개인적 시각으로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왔다. 김보민의 작품들이 가지는 설득력도 거기서 유래했다. 거기서 더 나가기 위해서 이제 김보민은 자신이 그린 그림의 지리적 위치를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모든 풍경들에 대해 그 역사와 의미들을 되묻고, 그 장소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연결 고리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강홍구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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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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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zns 실제로 서울이 저렇다면 어떨까요? 2010.09.29 11:15:08
kim_042 서울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작품들이네요. 현대적 구조물과 한국적 표현기법이 재미있습니다. 2010.09.28 17:37:19
ArtKim 국사시간에 배웠던 대한민국의 옛지도에서 본 듯한 전통 기법에 현실의 결합이 절묘합니다. 고해상도로 줌인 해서 보니 작품이 실제 전시회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 2010.09.18 22: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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