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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전시제목 진실한 남자 등록일자 2013.02.05
전시기간 2013.02.05 ~ 2013.03.05 전시장소 대안공간 루프

진실한 남자 나무패널에 유화가변설치 2011

진실한 남자 나무패널에 유화, 펜60x41.3cm 2011


정주아 개인전 <진실한 남자>



○ 일시: 2013. 2. 5 – 3. 5
○ 주관: 대안공간 루프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관람시간: 11:00 – 20:00
○ 장소: 대안공간 루프


○ 전시소개
 
나는 진실만을..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 <잔 다르크의 수난> 중에서
 
심판 받는 한 여인의 맹세와 함께 덴마크의 칼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감독의 무성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1928)은 시작된다. 영화 내내 심판 받는 여인의 얼굴은 자신을 심판하려는 남자들이 아닌 하늘을 향해있다. 그리고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이 수많은 말들을 눈물로 호소한다. 무성 영화 안에서 언어는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맹세하는 진실이란 그녀의 음성이 아닌 그녀의 얼굴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나고(express), 그렇게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진실뿐 아니라 언어 이전의 그녀의 내부세계까지 함께 투영한다(impress).
 
정주아 작가의 <진실한 남자> 역시 자신의 몸을 하나의 발화 기관으로 삼고 그 몸짓을 어떤 언어로 상정하여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누구를 향하고 누구에게 읽혀질 수 있을까? 언어는 기본적으로 메타적이기에 타자에 의해 해석되며, 진화마저 가능해야 한다.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의 실현을 목적으로 만든 로지반(La Lojban)이나 인간 사고의 명료화를 목적으로 만든 보아보무(BABM)와 같은 실험어, 자기 만족을 위해 스스로의 언어를 만드는 개인 인공어, 그리고 은어와 수화에 이르기까지 언어에는 그것의 규칙이 있다. 이를 통해 언어는 해독 가능하며 자신의 규칙으로 그 규칙마저도 선언 가능하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진실한 남자>의 몸짓에는 어떠한 규칙이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몸과 몸짓에 의지하여 바라보기를 시도할 뿐이다. 이처럼 우연으로 이루어진 ‘진실한 남자’의 몸짓은 그것이 그 순간 이후에는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이전의 몸짓들을 통해 앞으로의 몸짓이 해독 불가능하므로 언어와 구별된다.
 
과연 정주아 작가의 <진실한 남자> 의 몸짓이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면, 즉 그의 몸짓이 규칙과 반복에 의해서 해독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진실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에 의하면 몸은 ‘육화된 의식’으로써 스스로 보는 자이면서 스스로 보이는 자이다. 1862년 프랑스 신경학자 기욤 뒤센느(Guillaume Duchenne, 1806-1875)는 안면신경마비증(Bell’s palsy)을 앓고 있는 구두장이와 한 젊은 여자의 얼굴에 전기 자극을 주어 얼굴의 표정을 연구하였는데, 이 때 기록된 사진들은 인간의 얼굴 근육들이 내부의 진실된 감정을 미묘하게 표현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경이 마비된 구두장이의 얼굴 근육들은 단지 자극에만 반응하였지만, 젊은 여자의 경우 자극에 의한 인위적인 변화 외에도 나머지 다른 근육들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내부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짐승들과 다르게 인간의 안면 근육은 16개로 이루어져 있어 그 조합을 통해 자기 특유의 표정이 표현 가능하다. 또한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과 같은 동작으로 다른 인물을 모사하는 ‘미믹(mimic)’, 과장된 몸짓으로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연기하는 무언극 ‘판토마임(pantomime)’ 등 어떤 몸짓 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전달 가능하며, 이 몸짓은 일상 생활에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표현한다. 이렇듯 스스로 보는 자이면서 스스로 보이는 자로서 바깥과 내부로 되먹임 되어지는 몸은 하나의 언어로써 우리 자신에게 이입된다.
 
정주아 작가는 <진실한 남자>의 드로잉을 위하여 공방의 버려지거나 작업 후 남은 자투리 나무 조각들을 주워와 하나의 조각보처럼 이어 붙인다. 마치 흘려지거나 버려진 말들처럼 조각난 것들 위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다시 이어 붙여짐(patchwork)으로써 새롭게 생성되는 것들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M. Eisenstein)이 무성 영화 <전함 포템킨 (The Battleship Potemkin)> (1925)에서 보여준 몽타주 기법은 상반된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이미지를 의도하는데, 마치 이 몽타주가 보여주듯이 조각난 이미지들의 조합은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연접된다. 정주아 작가가 그린 이미지들의 조합과 배치를 통해 생성된 하나의 이미지, 즉 이미지 전체는 나열된 문자들에서의 인과에 의한 사실이 아니라, 부분들의 연접을 통해서 문자와 문자 사이에 놓인 드러나지 않는 의미들로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것들을 어떤 징후로써 드러낸다.
 
미디어 사상가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에 의하면 그림을 보는 시선은 이미 보았던 그림의 구성요소로 되돌아 갈 수 있으며, 반대로 이전의 것으로부터 앞으로의 것을 생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의 회귀는 역사적 선형성의 세계, 즉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반복되지 않고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를 지니는 선형성의 세계와 구분된다. <진실한 남자>의 몸짓 또한 하나의 이미지로써 문자에 의한 선형적인 사고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비선형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해독 가능한 것이다. 단지 평면 위에서 나열되어질 때 그것들은 정돈되어져 자신들의 숨을 죽이지만, 시선의 회귀 안에서 그 이미지들은 언어가 되기 이전의 모습들로 드러난다.
 
정주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프랑스 유학시절 먼 타지에서 내부의 언어들을 공유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일단 진실해지자고 다짐했다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심지어 자신의 치부일지라도 일단 그것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언어 이전의 표현들, 즉 하나의 몸짓으로, 쪼개어진 근육들로 마침내는 자신의 장기까지 드러내 보이며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고자 하는 그녀의 <진실한 남자>는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의 여인이 그러했듯이 몸과 그 몸짓을 통해 언어를 잃어버린 작가를 투영하고 있다. 또한 스스로를 보는 자 혹은 스스로를 보이는 자로써, 발화되지 못하는 언어 이전의 것들을 하나의 진실로 그녀의 몸과 근육 위에 그리고 나무조각들 위에 담으려 한다. 그것은 체온처럼 숫자가 되어 읽혀지는 것이 아닌 몸에 담겨진 열의 발화이다.
 
글 박정연 (대안공간루프 객원 큐레이터)
문의처
02-3141-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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