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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전시제목 사진행위 프로젝트- 이명호 사진전 등록일자 2010.11.16
전시기간 2010.11.13 ~ 2011.01.06 전시장소 고은사진미술관

ⓒ이명호 <Tree #6>, 종이에 잉크, (H)620x(W)520mm, 2009

ⓒ이명호, <Sea #2>, 종이에 잉크, (H)1120x(W)2440mm, 2010

ⓒ이명호, <Near Scape #1>, 종이에 잉크, (H)155x(W)130mm, 2010



Tabula Rasa + 사진-행위적Trompe l’oeil
 
 
사진작가 이명호의<나무>는 ‘나’에게로 향하는 여행이다. 눈을 통해 마음으로 향하는 고된 여정으로의 초대이다. 나무에 투영된 ‘나’의 모습을 캔버스로 떠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시적(詩的)으로 승화시킨 작가가 보는이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나’의 눈에 비친 것은 무엇이냐고, ‘나’의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나’의 존재는 무엇이냐고.
 
그렇기에 <나무> 앞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나’의 느낌을, ‘나’의 얘기를 늘어 놓는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엇갈리는 감상 평들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다. 언뜻 보면 해맑기만 한,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에 대한 고뇌를 안으로 갈무리한 사람이나 지을 수 있을 법한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캔버스로 나무를 떠내는 행위의 목적은 환기(喚起)”라고 되뇔 뿐이다. 백지 상태와 다름 아닌 캔버스 앞에 있는 것은 그저 한 그루 “나무의 초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난 길 끝 의식의 저편에서 불러온 ‘나’라는 존재의 초상이길 바란다는 얘기를 구구한 설명 없이 염화시중(拈華示衆) 의 미소와 “환기(喚起)”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리라.
 
“동양의 선적(禪的) 정서를 느끼게 한다”는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명호의<나무>에는 선적(禪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젠’ 스타일 정원(Japanese Zen garden) 에서 서양인들이 흔히 느끼곤 하는 고즈넉한 미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벽을 마주한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하는 수도승의 명상적 깊이가 살짝 옅보이는 듯도 하니까. 하지만<나무>가 선적(禪的)으로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나무 뒤 캔버스처럼 깨끗이 비워진 상태로 만들고, 내가 아는 ‘나’와 세상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고된 수기(修己) 의 과정을 정중동(靜中動) 의 예술적 체험으로 승화한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무>에는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선험적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창작의지나 현학적 허세가 없다. 공허한 숭고미(崇高美)라든가 근거 없는 비장미(悲壯美)를 자아내며 의도한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얄팍한 눈속임 수법 또한 없다. 대신 작가 자신의 말처럼 “감성적 이야기를 배제한 상태”에서 하얀 캔버스에 담은 “나무의 초상”을 통해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나’를 드러내겠다는 풋풋한 열정이 있다. 미리 정해 놓은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보는 이의 눈’ (Eye of the beholder) 에 맡겨 두겠다는 열린 마음도 담겨있다. 작가가 느꼈을 기대 반 걱정반의 떨림도 있고.
 
결국<나무>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를 알고자 각고의 노력을 거듭했던 ‘사진-행위’작가 이명호의 “Tabula rasa” 이자 ‘나’로 향하는 여행에 동참하지 않겠냐며 그가 보는 이에게 건네는 빈 티켓이다.
 
그렇다면<바다>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체험, 그리고 내면화된 체험인 기억을 통해 이뤄진다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의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교묘하게 기억을 재단하고 눈을 현혹시켜 물이라곤 단 한 방울도 없는 사막 위에 펼쳐진 모래의 바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사진-행위적 “Trompe l’oeil” 이다.
 
드넓은 사막 한 가운데 캔버스를 길게 펼쳐 놓고 멀리서 찍은 사진에 <바다>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작품을 직접 보지 않고 설명만 듣는다면 실소를 터뜨리거나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벌이는 그렇고 그런 장난질이려니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고 본다면, 다시 말해 ‘알고’ 본다면 <바다>에서 바다가 보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하지만 작품에 대해 아무런 귀띔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혹은 제목조차 모른 채<바다>와 맞닥뜨린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넘실넘실 햇빛을 반사하며 아른거리는 바다가 백사장 너머 저 멀리로 보이는 것은 – 그런 착시현상을 겪는 것은 –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의 눈과 마음을 옭아매는 “Trompe l’oeil”의 덫에 걸려 육지에서 바라본 바다의 다양한 모습들이 저장돼 있는‘나’의 기억 속을 뒤져<바다>와 비슷한 장면을 찾아내게 될 테니까.
 
<바다>는 <나무> 연작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확신을 얻은 작가가 뜬금없이 던지는 무언의 농(弄) 이고 선문답이다. ‘나’의 눈이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확실하냐며 걸어오는 짓궂은 장난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 보라는 은근한 꼬드김이다.
 
 
김영준(미술비평, 콜롬비아대 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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