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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당신과 나의 삶이 이항(移項)할때 (The Moment of Transposition) 등록일자 2010.09.09
전시기간 2010.09.10 ~ 2010.10.10 전시장소 일민미술관(ILMIN MUSEUM OF ART)

'Transposition'이라는 용어는 음악, 수학, 미술,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인다. 수학의 방정식에서 transposition은 등식의 한변에 있는 항을 부호를 바꾸어 다른 변으로 옮기는 이항을 말한다. 음악에서는 멜로디를 그대로 유지하며 음역의 높낮이를 바꾸는 조옮김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의 낯설게 하기에서 나타나는 전위 또한 transposition이다. 어느 경우건 공통적인 것은 위치를 바꾸되(trans-position), 구성요소들간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며 전혀 새로운 구조로 진입한다는 점이다.  이 전시는 'transposition'을 편의상 "이항"으로 번역하면서 오늘날 새로이 대두되는 삶의 형태를 고찰하기 위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즉 이항이라는 계기를 "주체가 새로운 경험의 구조로 재 위치하는 시간적, 공간적 과정"으로 정의한다. 새로운 경험 구조로의 이동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매우 빈번히 일어나며, 우리의 삶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하나의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의 이동,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의 이동,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동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민immigration나 이산diaspora이 아닌, 이항transposition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하려는 것은 오늘날의 주도적 이동을 설명하기에 보다 적절하기 때문이다. 우선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떠나간 구성원의 이주를 다룬다. 따라서 기원이나 정체성이 문제시 된다. 반면 이민은 새로운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이주해 온 구성원의 문제를 다룬다. 중요한 것은 융화의 문제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도적인 이동 방식은 떠나온 장소나 새로운 장소 어디에도 중심을 두지 않는다. 이주는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선택에 의한 것이며 원하면 언제든 기존의 장소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거나, 새로운 땅에 융화되어야 하는 당위를 말하지 않는다. 기존의 존재방식을 준거로 하여 새로이 얻게 되는 존재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자적 위치를 즐긴다. 이것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새로이 대두되는 이동이며, 이 전시가 다루려는 것이다. 이항의 계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체의 변화다. 지금까지 형성된 나라는 주체는 새로이 구조화된 감각적 경험을 통해 변화하기 시작한다. 경험은 낯설고 이에 대한 반응 역시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 요구된다. 이렇게 모든 것에 새로이 반응하는 가운데 기존의 나를 형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급기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까지 이른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변 환경에 의해 새로이 형성되는, 낯선 탐구의 대상인 객체의 자리에 선다. 즉 이항의 순간 주체와 타자의 자리바꿈이 일어나고, 비로소 주체 안에 내재한 타자성, 차이, 균열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체의 새로운 위치지음은 새로운 사유를 유발한다. 이제까지 부력에 의존해 헤엄치던 물짐승이 척추를 내리누르는 무게를 버티고 뭍에 한발을 내딛듯이 내게 익숙한 관습적 사고와 환경, 그 자기장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향하게 된다. 이것이 이항의 계기가 갖는 긍정성이다. 따라서 이항의 경험을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취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인식 지평을 확대하고 삶을 풍부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론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객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을 내재한 새로운 주체로 다시 서는 길이기도 하다. 이 전시에 포함된 작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이항을 경험해 왔으며, 그러한 경험을 주체를 새로이 위치짓고 인식을 확장하는 어떤 계기로 삼아왔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예민하게 자각하여 작품으로 결절화한다. 이들의 경험이 공유된다면 그것은 동시대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시는 이항하는 주체들의 동시대성을 성찰하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김지은_풍납토성 설치를 위한 드로잉_수성 페인트, 라인 테입_3×24m_2010(제작 예정)

 

김지은 작가는 도시환경과 그러한 환경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라는 측면을 성찰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작가는 특정 지역의 거주 환경을 자세히 살핀 뒤 흥미있는 장소나 건축물을 찾아내고 연구하여 콜라주나 건축자재, 테이프 등으로 재구축한다. 가령 네브라스카에서는 지역주민들이 옥수수를 저장하기 위해 이용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관심 대상이었고 디트로이트의 경우 자동차 산업의 쇠퇴 이후 공동화되어가는 도시의 폐허에 주목했다. 오랜 미국생활 후에 한국에 돌아온 작가의 관심을 끈 것은 풍납토성이다. 백제 왕릉터로 추정되는 토성과 현대의 고층 아파트가 2000년이라는 시간차를 뛰어넘어 공존하는 곳. 문화재 보호와 재산권 행사라는 상반된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곳.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저"언덕"이라 여기며 무심히 지나치는 곳. 풍납토성을 지척에 두고 20여년간 관심없던 작가를 눈뜨게 한건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생겨난 인식의 변화다. 한국에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한국에 관심을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작가.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납토성의 기이한 풍경을 장소 특정적 설치로 옮겨놓은 이 작품은 관객의 또다른 개입을 기다리는 공간이 될 것이다.

 



박경근_청계천 메들리 스틸 이미지 1_5채널 영상설치_2010




박경근_청계천 메들리 스틸 이미지 2_5채널 영상설치_2010




박경근_청계천 메들리 스틸 이미지 3_5채널 영상설치_2010

 

박경근의「청계천 메들리」는 본래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위에 작가의 자전적 진술을 더한 영화다. 영화속의 화자인 작가는 자신의 반복되는 불안, 악몽의 근원을 세대를 가로지르는 무의식적 기억과 연관시킨다.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에게로 전해져 오는 급격한 산업 발전과 그에 따른 전통의 단절과 충격이라는 경험은 개발주의에 밀려나는 청계천의 풍경과 만나면서 작가 개인의 사적 경험이 아닌, 동시대 한국인의 집단 경험으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청계천 메들리」를 5채널 영상으로 새로이 편집하여 보여준다. 불가사리 설화, 청계천 상가의 풍경, 근대 한국의 기록 화면, 기계의 움직임등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역사를 구성하는 다차원의 내러티브와 개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공감각적 경험을 그대로 공간속에 펼쳐둔다.

 



박지현_Uptown, Uptown_향, 금분, 나무_2008

 

박지현 작가는 익숙한 단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시각화하여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파열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방석으로 집을 지어 "방석집"이라 부르고 브로콜리 정원에 노니는 닭을 중국음식인 "치킨 앤 브로콜리" 라 부르는 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말장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이 살아온 서울, 뉴욕이라는 두 도시에 대한 경험을 드러낸다. 작가가 10여년을 머무른 뉴욕은 그 안에 살면서도 결코 가까이 다가갈수 없는 신기루 같은 곳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섬 라퓨타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뉴욕의 부촌인 업타운의 축소모형을 향으로 제작한 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uptown, uptown」이라 이름짓는다. 이는 눈앞에 있지만 손에 닿지 않는 뉴욕에 대한 진술이자 그 안에서 끊임없이 타자화되던 본인의 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또한 이번에 되돌아온 서울에서 작가는 인공화된 낙원의 이미지를 본다. 눈부시고 아름답지만 어딘지 인공적이고 촌스러운 도시. 나아가 부동산으로서의 땅이 막대한 가치를 갖고 이제 작가 본인이 정착(landing)해야 할 도시. 따라서 서울은 작가에게 에버랜드도, 디즈니랜드도 아닌 랜드 랜드「Land, Land」다.

 



로버트 리_Unknown Game #5_복합재료_가변크기_2009




로버트 리_Unknown Game #21_복합재료_가변크기_2009

 

로버트 리의「Unknown Game」시리즈는 본래의 맥락에서 "이탈된 오브제(displaced object)"를 다루고 있다. 가령 뮤지엄에 전시된 아프리카 부족의 장신구가 있다고 하자. 본래의 쓰임새, 의미, 소유자로부터 분리되어 전시된 이"오브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용도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기원을 모른채 감각적 경험에 기대야 하는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작가는 적당히 낯이 익고 적당히 낯선 상태, 그것에 대해 안다고도 할 수 없고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에 의미를 둔다. 이는 한국인 부모를 둔 미국인인 작가가 언제나 맞닥뜨리는 기원이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로버트 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재료를 이용하여 그 쓰임새를 가늠하기 어려운 도구를 만들어 낸다. 가령 식물의 껍질, 플라스틱 컵, 빨대, 조롱박과 같은 것들이다. 흔한 일상의 재료들을 이용한 까닭에 얼핏 낯익지만,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작가가 형상 자체에서 오는 특정 방식의 연상작용이나 상징화, 손쉬운 의미규정을 의도적으로 피해가기 때문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물이 스스로 말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 앞에서 사람들은 익숙함과 낯설음 사이의 긴장이 주는 감각적 경험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상을 살피고 곰곰히 쓰임새를 유추하고 느껴보게 된다. 너무나 손쉽게 사물의 기원을 규정하여 범주화하려는 습관을 멈추고, 내 앞에 주어진 새로운 감각적 경험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 이것이 작가가 우리를 유도해 가는 방향이다.

 


탐리_Shin-Guru-Tangle_캔버스에 유채_225×204cm_2010




탐리_Pure Fake_캔버스에 유채_259×194cm_2010

 

탐리는 자신의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던 작가가 적극적으로 외부세계,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한 작업이 「Creative Commons」시리즈다. 이전까지 작가의 작업이 콜라주와 유화를 이용한 추상이었던 반면, 이 시리즈부터는 대중문화나 유명작가의 작품 속 이미지들이 화폭 위에 어지럽게 나타난다. 작가가 차용하는 이미지들은 스머프나 미키마우스 같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부터 신윤복의 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심지어 김일성이나 조지부시와 같은 실제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혼성 모방의 전략 자체가 색다를 것은 없다. 다만 작가에게 이 시리즈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면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꼴라주하듯 화폭에 옮기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TV의 채널을 휙휙 돌릴 때처럼 이미지들이 충돌하고 교섭하는 화면이 우리에게 묘한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은 다양한 문화를 넘나드는 이러한 경험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점점 익숙한 어떤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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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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