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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활동이 활발한 작가들 조명

박진아는 빈 공간과 빈 순간을 그린다.

작가의 작품 속, 한강 고수부지에서 소풍을 즐기는 한 무리의 사람들, 담배를 피는 여자, 미술관에서 작품이 상영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은 생산의 반대쪽에서 대상이 부재한 장소와 비생산의 순간에 놓여있다. 박진아는 2004년부터 3년 여간 로모사의 한 토이카메라로 작가 주변의 아티스트나 친구들을 촬영한 장면들을 몇 편의 시리즈로 그린다. 사진을 사용하는 것이 작가가 사건의 현장에 다가가는 고리이지만, 사건을 기록한다는 의미가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다. 박진아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회화적 공간과 현실의 순간이 오버랩되는 지점이다. <섬>에서는 작가는 한 캔버스에 4개의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풀밭위의 소풍을 그린다. 화면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바닥에 깔린 하얀색 천 위에 일종의 섬처럼 풀밭위에 떠서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문탠> 시리즈는 로모그래피 시리즈를 끝내고 그림으로 변화되는 첫 작품으로 작품 제목이 말해주듯 해를 대신하여 밤의 달빛으로 태닝을 한다는 멜랑콜리함과 땅거미진 잔디밭, 여기서 파티를 하는 고독어린 젊은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공기 중에는 하얀 무언가가 떠다닌다. 네 개의 캔버스에 벌어진 사건들 사이에는 어떠한 점진적 진행이나 서술적 내러티브도 내포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만의 시간적 리듬을 갖는 순환적인 구성의 회화이다.

이를 소개했던 개인전 제목인 은 박진아의 회화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비생산의 순간을 의미한다. 담배 피우는 순간, 한강 고수부지의 한적함이나 공원에서의 피크닉과 같은 장면들은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 아닌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에서 벗어난 휴식의 순간, 여가의 순간이다. 생산과 재생산을 강요하던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작가는 한발짝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비생산의 순간을 재현한다. 이것은 더 많은 생산을 위한 휴식이나 여가가 아닌, 그대로 존재한다.

2007년부터 작가는 ‘먹는’ 장면이라는 인간의 필수 활동의 순간을 그린다.

음식을 먹으려 입을 벌리는 순간은 파티에 있을 다른 누군가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순간이며 정지된 순간이다. 한 사람이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이라는 것은 ‘식욕’에서 출발한 인간 생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목적의 순간이라기 보다는 동물적 집중력이 요구되는 행위의 순간을 작가는 캡쳐한다. 최근 박진아는 미술관 안으로 작품의 공간을 좁히며, 예술이 이러한 무의미와 무생산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프로젝터 테스트>는 전시를 위해 설치하는 중간, 프로젝터가 작품을 영사하기 전의 컴퓨터 바탕화면이 보이는 순간이다. 파랗게 보이는 빈 화면 앞에 큐레이터와 아티스트, 테크니션들이 서 있다. 빈 기표 앞에 모두들 숨 죽이고 있다. 일종의 메타- 그림이라고 할 이런 회화들이 박진아만이 이루어낸 최초의 시도는 아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쿠르베의 ‘화실’과 같은 과거 서양 회화 작품들에서 시도들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그림들은 ‘그림’에 관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아티스트’의 노동의 순간을 그린다면, 박진아의 회화들은 오히려 예술에서 예술 창작이라는 노동 행위나 심지어는 예술 작품 자체가 부재한다.

<저 위 조명>에서는 큐레이터와 아티스트는 위를 쳐다보고 있다. 작품 제목을 읽지 않는다면, 이들이 미술관안에서 무엇을 하는 순간인지, 왜 멈추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바닥에는 작품을 싸던 하얀색 봉지가 추상적 형태로 그림 아랫면에 위치한다. 미술관에서의 계몽주의적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박진아는 이러한 ‘비생산적’ 공동체는 ‘미술관 속에서만 살아남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비생산적 공동체가 공유하고자 하는 현대 예술의 ‘사용 가치’를 통해, 이러한 회화 작품들은 미학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이에 대한 비평적 엘리티즘을 자극시키는 예술의 잠재적 사용가치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남자> 시리즈에서 박진아는 시간차를 두고 벌어지는 두 장면을 그린다. 한 명은 자신의 작품을 하얀 천으로 뒤덮고 있으며, 다른 이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바닥이나 뒤를 돌아보며 서 있다. 흰 천을 덮은 작품은 마치 그 죽음을 알리는 하얀 관 같아 보인다. 이러한 관의 이미지는 또다른 작품인 <그랜드 피아노> 에서도 등장한다. 검은 천에 뒤덮인 그랜드 피아노는 그림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 연주되지 않는 피아노와 이를 둘러싼 사람들. 이들의 얼굴초차 유령처럼 보이며, 갤러리의 흰 벽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작품을 덮은 흰 형상이나 그랜드 피아노의 검은 형상은 3차원적 물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윤곽으로 존재한다. 윤곽만의 부피감을 가지고 전체 그림 속 환경과는 격리된 그 안의 세계가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박진아는 서구 회화의 강한 역사적 전통을 뒤로 한 채, 자신이 인지하는 감각적 사실을 회화적 장면으로 재현한다. 서정적으로 여겨지는 작가의 작품 속에는 내면적이고 자기중심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비생산의 순간을 재현하며, 예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 양지윤(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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