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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에서 관객을 쏘아보는 저 사내는 빈센트 반 고흐

화면 속에서 관객을 쏘아보는 저 사내는 빈센트 반 고흐. 이 네덜란드인 자화상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진을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작가는 고흐의 자화상을 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흐는 저런 사진을 남긴 적은 없다. 따라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고흐의 이미지는 물론 화가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일 게다. 그런데 손으로 그린 그림이 마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처럼 생생하다. 그 세상의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그의 사진을 작가 혼자 몰래 갖고 있는 것일까?
강형구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포토리얼리즘을 본다. 하지만 강형구는 포토리얼리스트가 아니다. 비록 작가 자신이 척 클로스에게 입은 영향을 인정하지만, 그의 작업은 사진을 캔버스에 옮겨놓는 포토리얼리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강형구의 작품에는 전사(轉寫)의 대상이 되는 사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토리얼리즘의 작품은 사진을 전사한 것이기에 피사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진처럼 보인다 해도 강형구가 그린 이미지들에는 피사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또한 작업의 방식의 차이를 낳는다.

앤디 워홀이 작품의 제작에 실크 스크린이라는 기술복제를 사용할 때, 그로써 그는 회화라는 장인적 제작의 마지막 영역에까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팝 아트의 후예로서 포토리얼리스트들 역시 작품의 제작에 그리드나 슬라이드 프로젝션과 같은 기계적 절차를 사용한다. 하지만 강형구의 이미지에는 지표성(indexicality)가 없다. 거기에는 증언해야 할 피사체도, 전사해야 할 사진도, 투사할 필름도 없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은 수공에 따르게 된다.

그의 리얼리즘은 철저히 장인적 방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물론 그림에 극사실의 효과를 주는 데에는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베끼는 것이 유용하거나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강형구는 자신이 이미지 제작에 기술복제의 방식을 사용할 경우 "작업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진의 효과를 내는 데에는 물론 핀젤이라는 거친 회화적 도구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는 에어브러시, 못, 드릴, 면봉, 이쑤시개, 지우개 등 온갖 비정규적인 수단들이 동원된다.

포토리얼리스트들은 원작과 복제의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사진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강형구의 극사실주의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화시키려면 극사실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의 눈은 이처럼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 개연성, 가능성의 지대를 향한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도, 사진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아니다. 레프 마노비치가 CG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것은 그저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알려진 인물의 모습을 사진으로 인식하는데, 나는 그렇게 알려진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선들을 조립해 원형을 복원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순간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영원히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형구는 사진을 파괴함으로써 피사체에 생명을 되돌려준다. 강형구가 창조한 '다른 현실' 속에서는 이미 죽은 워홀과 먼로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간다.

회화와 사진 사이에는 엄청난 정보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회화적 묘사에 사진과 같은 해상도를 부여하려면, 발굴된 화석의 골격을 보고 주라기 공룡의 외관을 재구성하듯이, 부족한 정보를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다빈치의 초상에 주름을 그려 넣기 위해 강형구는 수많은 노인들의 얼굴을 시각적으로 종합해야 했다. 영화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엑스트라들의 얼굴은 링컨이나 고흐의 얼굴로 종합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을 우리는 '합성사실주의'(synthetic realism)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형구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컴퓨터 그래픽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컴퓨터 기술에 힘입어 주라기의 공룡은 화석이라는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면 한 인물의 유년기 모습이나 노년기 모습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제시할 수도 있다. 나아가 포토샵을 비롯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여러 장의 사진을 합성해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디지털 대중의 일상이 되었다. 강형구는 자신의 제작이 "잉크젯 프린트 방식"을 닮았다고 말한다.

19세기까지 시각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회화였다.

20세기 대중의 지각을 결정한 것은 사진술과 영화술이었다. 회화는 굳이 피사체를 요구하지 않으나 그 대신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반면 사진의 경우 사실성은 뛰어나나 반드시 피사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은 피사체가 없는 이미지에도 사진과 같은 생생함을 부여한다. 생성 이미지, 가령 스크린이나 모니터 위의 CGI 속에서 역사적으로 선행한 두 종류의 이미지는 하나가 된다. 이 합성리얼리즘이 21세기의 시각문화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은 수공에 따르게 된다.

워홀의 작업이 광고 이미지를 위해 실크 스크린을 뜨는 직공의 것을 닮았다면, 엄청난 노력으로 이미지의 해상도를 뜨겁게 끌어올리는 강형구의 작업은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 컴퓨터 그래픽 엔지니어의 그것에 가깝다. 워홀이 복제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예언했다면, 강형구는 이제 막 등장한 새로운 이미지 취향, 즉 디지털 합성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다. 워홀의 기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대중은 실크스크린으로 이미지를 복제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로 이미지를 합성하고 있다.

워홀이 성공을 했다면, 그의 작품에서는 분위기가 느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고 의도적으로 복제를 닮음으로써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는 것이 현대의 대중의 성향을 반영한다. 반면 강형구의 이미지에는 분명히 어떤 아우라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인물의 강렬한 시선에서 나온다. 보들레르에 관한 베냐민의 논문에는 아우라의 또 다른 정의가 등장한다. '시선의 마주침.'

사진처럼 뜨거운 이미지를 그리던 강형구가 캐리커처에 손을 댄 것은 언뜻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 만화처럼 차가운 이미지들은 물론 자기목적을 가진 게 아니다. 그것은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기 위한 습작이었다. 전혀 닮지 않게 그리면서도 닮게 그리는 것이 캐리커처의 특성. 그것은 현상의 복잡함 속에서 인물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을 잡아내는 데에 도움을 준다. 600여점의 습작을 통해 강형구가 알아낸 것은, 한 인물의 인상을 결정하는 부위는 눈이라는 사실이었다.

시선은 관객을 찌른다. 그 눈빛의 강렬함은 관객에게 따가운 느낌을 준다. 시선이 발휘하는 촉각적 효과, 그로 인해 맺어지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내밀한 인격적 관계.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의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의 푼크툼은 지표성에서, 다시 말하면 실제로 존재했던 것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강형구의 작품은 한갓 픽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없었던 것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제시하는 거짓말이다. 지표성이 없는 이미지가 어떻게 푼크툼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 현실의 달라진 정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워홀의 현실은 복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저 현실은 그저 복제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동시에 생성되거나 합성되고 있다. 현실은 더 이상 주어진 것(datum)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디지털 생성과 합성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factum) 있다. 디지털의 대중에게는 현실 자체가 생성되고 합성된 이미지의 형태로 주어진다. 강형구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인공적 현실도 자연화되면 푼크툼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진중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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