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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하는 점. 선. 면.

미술은 그 불변의 본질을 제외하면, 그 형태, 방식, 역할은 시대적 콘텍스트에 따라 진화해 왔다.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미학적 실천은 오브제들 혹은 형상들을 완성하기 이전 단계부터, 그들이 구상하는 오브제나 형상이 하나의 고정된 구조 속에서 진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형식은 오브제들 혹은 형상들의 활동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즉, 오늘날 작품 활동이란 모종의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계획을 세우며,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생산적 결합을 위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회화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회화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아마도 이러한 변화의 현주소를 가늠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회화는 우리에게 과거와는 조금 다른 각도의 질문들을 던져준다. 이전에는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가에 주목했지만, 이제는 무엇이 작품의 영역을 결정하며, 어떤 제스처에 의해서 작품의 영역이 시작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작품은 그 영역의 한계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그것의 탐구 흔적을 남기는가, 또 이 영역의 윤곽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게 된다. 오늘날 작품의 영역이 주제라는 다소 광범위한 개념을 대신하게 되면서, 무엇을 그렸는가 보다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서 어떠한 계획을 구상하고, 그것을 위하여 어떠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며, 또 작가의 논리와 형식은 여기서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장승택의 작업이 흥미로운 까닭은 바로 그가 무엇을 그릴까 보다는 ‘회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질문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회화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회화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회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회화’를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스텔라에게 있어서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결국 회화를 구성하는 최소한 혹은 절대적 요소인 색과 면만을 남기게 되었으며, 이 평면은 현실을 재현하는 평면을 넘어 또 회화 그 자체를 넘어 독특한 ‘오브제’의 탄생을 가져 왔다. 스텔라와 함께 시작된 회화의 모험은 오늘날 화가들에게 캔버스에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 보다는 오히려 평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또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장승택은 회화에서 바로 이 ‘어떻게’에 집중하며, 2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만드는 회화’, 즉 평면을 만드는 일에 전념한 보기 드문 작가다.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 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선상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형식이 곧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장승택의 회화는 형식과 내용이 완벽하게 일체가 되는 상태를 찾아 끊임없는 실험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초 붓과 캔버스를 떠나기 전 장승택의 회화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며 사후세계를 추상화하는 과정이었다. 다소 과격한 회화적 제스처와 검은 색, 회색, 흰색들이 뒤섞여 있는 공간은 죽음, 절망, 영혼에 대한 추상성을 극대화시킨다. 그 이후 장승택의 이러한 추상성의 탐구는 ‘회화적으로’ 보다는 물질/재료의 성질을 통해서 발현된다. 93년도에 그는 처음으로 회화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레진, 왁스, 파라핀 등의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그 방법도 변화했다. 이 시기 그는 패널에 프레임을 만들고 끓인 왁스에 오일을 컬러에 섞여서 붓고, 굳으면 또 다른 색을 붓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프레임은 다양한 색채들이 섞이면서 반투명 평면이 되고 마지막 단계에서 작가는 이 평면을 화염방사기로 마무리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제 회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평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브제’인 하지만 회화와 조각 사이에 존재하는 ‘평면-오브제’가 탄생했다. 이후 장승택은 플렉시 글라스와 오일, 혹은 폴리에스터 필름을 사용하며 ‘평면-오브제’ 탐구를 지속한다. 플렉시 글라스 원판에 오일을 올린 후 그 평면을 손 혹은 롤러로 문지르는 과정에서 표면에 형성되는 오일 텍스처는 우리의 시선이 어떤 각도에 고정되는 가에 따라 또 ‘빛의  로 존재하며, 빛이 평면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여기서 플랙시 글라스와 제스처 그리고 유성물감의 적절한 사용법은 무엇보다도 ‘빛의 반사’에 역점을 둔 듯하다. 여러 겹의 다른 색상을 칠한 플랙시 글라스 표면에 빛이 투과되며 그 표면 안쪽의 다른 색들과 만나 반사하며 예기치 못한 색상들이 발현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후 그는 ‘평면-입체’를 더욱 더 정교한 방법으로 고안하며 ‘빛의 순환’을 통한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여러 개의 폴리에스터 필름에 구멍을 뚫고 그것을 중첩시킨 다음 표면을 유리 혹은 거울로 고정하고, 그 뒷면에도 공간감을 주기 위해서 홀로그램 시트를 부착시킨다. 이렇듯 표면과 공간, 빛과 색, 다양한 물질들이 중첩되고 순환하며 형성되는 작품을 그는 폴리페인팅(Poly-Painting)/폴리드로잉(Poly-Drawing)이라 명명하며 장승택 화화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빛은 장승택의 작업에서 평면을 공간으로, 단색을 다중적 색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요소다. 장승택의 폴리페인팅/폴리드로잉 시리즈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획기적인 방법들을 만들어 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비물질적 요소인 빛의 변화무쌍한 유희를 위한 독특한 공간을 고안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빛의 유희는 그의 작품의 물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하며, 평범한 색면을 예민한 공간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라인(Lines, 2012)’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장승택의 신작 시리즈는 폴리페인팅 방식을 연장하면서 하지만 이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평면과 입체’를 탐구하며, 빛의 효과를 실험하게 된다. 이번 라인 시리즈에서 P.C.튜브들을 접착한 후 특수 아크릴 물감으로 반투명 도색 한 입체들의 제목은 로, 투명 폴리에스터 필름을 칼로 스크레치를 낸 평면들은 로 제안된다. 이러한 평면과 입체 작품의 특징은 투명 폴리에스터 필름에 스크레치를 내고 그 필름들이 수 십장 겹쳐지면서 구조적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5미리 두께의 얇은 P.C.튜브들이 연결되며 형성되는 입체물이라는 점이다. 장승택은 이번 ‘라인’ 시리즈에서 평면을 떠난 입체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입체는 조각과는 다르다. 그의 입체는 벽이라는 평면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부조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20여 년이 넘게 ‘회화’의 문제에 천착하고 ‘화가’이기를 고집하는 장승택의 작업 문맥에서 그의 이번 입체물은 평면을 연장하며 회화의 변주로서 입체인 것이고, 사각형의 프레임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을 실제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다. 평면 속의 스크레치들이 더 넓은 평면(벽) 위로 잠시 외출한 것이다. 가느다란 P.C.튜브들은 일정한 각도와 규칙을 갖고 연결되지만 그 어떤 구체적 형태를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정의 규칙은 갖지만 최종적 형태는 거의 즉흥적 결과물인 이번 ‘라인’ 시리즈는 빛에 의해 생성되는 음영 효과를 물질화 혹은 조형적으로 구체화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라인-입체들()은 벽의 모서리를 타고 길게 내려오기도 하고, 벽면에 수평으로 길게 뻗어 나가기도 한다. 넒은 벽면에 자유롭게 자리 잡은 이 선들의 모임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광에 따라 오색찬란한 무지개 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무광의 단색조로 보이기도 한다. 라인-평면들()도 마찬가지다. 평면 속 중층을 이루는 가는 선들의 모임은 무한대의 공간으로 뻗어 나가며 건축도면을 방불케 하는 입체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 반투명 유리로 마감된 표면은 역시 자연광에 따라 매 순간 다채로운 색상들로 발현된다. 극도로 정제되고 세련된 색채, 빛에 따라 스스로 발화하는 형태, 간간히 아련하게 무한대로 펼쳐지는 미세한 공간들… 장승택의 이러한 평면-입체들은 색과 빛이 우연히 조우하며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공간을 형성한다. 그의 작업은 명확함, 논리, 정의, 실체, 형상을 암시하는 모든 표현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나는 장승택 작업의 색과 빛과 공간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는 있는 언어를 찾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묘한 기운은 느낄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색과 빛은 명명될 수 있고 인지 가능한 모든 형태들을 잠식하며, 희미한 점, 선, 면들은 알 수 없는 공간의 심연을 파고든다.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색들이 서로 섞이며 또 점과 선들이 만나고 겹치면서 형성되는 표면은 형상이 드러나기 직전의 상태이며, 그것을 기다리게 하는 표면이다. 어떤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혹은 무엇을 기다리게 하는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된다. 

장승택의 작업 방식은 회화를 감상하는 우리의 습관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과 직결된다. 읽거나 이해하는 회화가 아니라 감각하는 회화다. 장승택의 회화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들, 즉 점, 선, 면 그리고 빛과 색을 최대한으로 가동시키며 우리의 민감한 감각체계를 호출하는 정련된 도구로 작동한다. 이미 강렬한 자극과 선동적 이슈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장승택의 회화는 은근하지만 예민한 감성을 호출하고 조용하지만 잊을 수 없는 자극을 시도하며, 잠자고 있는 우리의 감각을 활성화 시킨다. 그는 2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재현의 대상, 주제, 이슈 없이 온전히 조형적 요소만으로 회화를 만드는 일에 전념해왔으며, 이것은 동시에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 작가가 화가이기를 고집하고 회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회화에서 미술의 다른 많은 매체의 특성들과의 ‘다름’을 찾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장승택은 회화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요소들, 특질, 확장 가능성의 무한한 실험을 통해서 회화의 제 문제들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다. 색과 빛으로 이루어진 평면이 우리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점, 선, 면으로 연결된 텅 빈 공간에 우리가 어떻게 머무를 수 있는가, 이야기가 없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을까, 감각이 개념과 주제를 대신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장승택의 회화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과 함께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성원(전시기획,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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