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ve

검색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이윤미의 공간은 형이상학적 경험을 요구한다.
 
 
- 실재공간, 시각공간 그리고 그là 저편au-delà 공간-
미술사를 통해 공간이란 테제를 주시해보면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이 공간에 의해 지성과 감성의 세계를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이윤미의 공간은 이런 컨텍스트에서 일차적으로 긴장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을 통하여 검은 선으로 제한된 의도적 큐브공간과 만난다. 이때 그녀의 세계는 얼핏 관념적이다. 일그러지긴 했으나 무시할 수 없는 입방체적 지각 공간, 그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된 사물들. 오랫동안 서양미술사가 그러했듯 사물과 배경 공간이란 구조라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우선 상식적인 부르넬레스키의 이 투시법적 공간은 너무나 익숙하여 지루하기 때문인지 그 입방체 공간을 암시하는 검은 선은 어디선가 뚝 뚝 끊겨진다. 놀랍게도 선의 끊김은 빠져나갈 수 있게 열려 있도록 관객의 착시를 유도한다. 저편의 빈 공간 또는 그 허공으로 다가가다 보면 앗, 물리적 벽에 부딪힌다. 그런데 깊숙이 뚫려진 무색의 또는 희미한 공간에 이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공간의 착시현상은 시각미술의 영원한 또는 운명적 DNA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녀의 공간 미학적 고민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이윤미 공간은 실재성과 추상성을 오간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렇다면 그녀 세계의 핵심 테제로 보이는 1)공간에 의한 착시, 착시에 의한 공간과 2) 허공에 그리는 사물의 실루엣 형상과 공간간에 예술적 사유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탐색하여야 한다. 그녀의 첫 번째 테제인 공간은 좀 더 소피스틱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담겨있는 폐쇄된 공간là 저편au-delà에는 무한히 열려있으리라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미지의 공간이 있다고 우리는 느끼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이쪽의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이 뚫려진 출구(?)를 통하여 저 멀리 있는 듯한 공간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그것은 유클리드적인 기하 공간의 한계와 폐쇄성을 탈출하려는 은근한 감성적 욕망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 그녀의 무미 무취의 차가운 중성적 지성은 무너지고 만다.
저편au-delà공간을 설정하는 것은 작가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이 더 적극적이다. 그녀는 관객과의 이 착시에 의한 공간놀이를 부단히 창출해 내면서 재미있어한다. 자신의 고독한 공간놀이에 관객이 끼어든다는 것은 기실 우리 시대의 소통의 내러티브다. 그녀의 예술적 지론이 자아 중심적이고 무감성적 주지주의적이었다면 그 벽을 슬그머니 열어주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엄격한 지적 자존심으로 포장된 내면에서 은밀한 감성이 새어나오는 이 작가만의 심미주의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차분하게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폴론적 심상의 세계에 다가가다 보면 어느 관객도 그 공간 속에 잡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조금도 구속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거기엔 종교적 명상보다는 오히려 빨려드는, 동화되는 매력을 느낀다. 작가와 관객이 같이 설정한 비가시적 공간을 이윤미는 제3의 공간이라고 한다. 그녀의 자작 노트에서 “……. 현실의 공간, 다른 하나는 꿈의 공간…….두공간은 결코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떼어낼 수 없는 공간…….하나를 분리하면 결국 모두 파멸되는 공간…….”이란 언급을 영화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을 통해서 강조하는데, 마치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추구하는 ‘제 3의 공간’은 분명히 처음에 간과했던 ‘공간의 관념적 틀’ 벗어나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시적 비가시적 공간을 이어주고 끊어주며 공간을 제약했다 열어놓았다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관념적 공간을 허물어 버린다는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데리다가 말하는 parergon(la verité en peinture) 즉, 경계허물기의 논리는 그녀에게 적절한 해법이 될 것이다.

-낯섦étrangeté의 내러티브-
이윤미의 공간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사유의 모티브는 공간에 놓인 듯 박힌 듯 드러나 있는 조형물들이다. 육면체, 의자, 항아리 그리고 그림자까지, 흐트러짐 없는 그라픽적 사물의 도(조)형은 경직성을 보이지만 그저 어떤 오브제라는 지시적 표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기물들의 선 드로잉은 무언가 작가의 내러티브를 위한 프롤로그 같다. 그녀는 기실 공간놀이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이야기를 첨가하고 싶어 한다. 가령 제임스 튜렐이나 조르지 루스 같은 이들의 공간놀이는 그 공간 설정에 소도구가 없다, 반면 이윤미는 소도구들이 이야기를 첨가한다. 그래서 더 섬세한 이야기 거리에 접근하면서 그녀의 고집스런 절대공간의 논리는 조금 희석된다. 그녀의 파라독스한 조형논리는 공간 속에서 사물의 기하학적 드로잉과 그림자 설정과의 관계다. 가령 바로크식 천정화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화면에서도 공간이 비어 있는 어떤 관념적 틈이냐 사물의 살corps과 같은 어떤 질료냐라는 논점과 정면으로 만난다. 이점에서 그녀는 좀 애매한 상황을 펼쳐간다. 육면체나 의자, 항아리, 그림자까지도 선 드로잉 상태라 실제 그것이 공간에 걸려 있건 벽에 붙어 있건 그것들의 질료corps는 공간의 질료와 동질이기 때문에- 관객은 시각적 변별력을 잃어버리고- 투명하게 겹쳐진다. 이 애매함은 이 공간/저편 공간이 그랬듯 그녀의 독특한 선 드로잉을 통한 ‘동질성’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가끔 관객에게 촉각적 경험을 요구하는 것 같다. 가령 검은 파이프의 선들, 모퉁이가 튀어나온 듯한 삼각뿔의 실체, 그것은 선으로만 나타난 육면체라는 일루전 illusion을 낯설게 촉각적으로 자극한다. 이 점은 꼴라주와도 다른 생생함이 기실 지금까지 그린다고 하는 회화의 illusionisme적 틀을 떠나고 있다.
이윤미의 의도는 공간에 끼어든 이 일상적 오브제들을 낯설게 하기다. 그 이유는 그의 지적 논리가 이 일상성을 허용하지 않는지, 아니면 ‘낯설음’이란 테제를 공간 속에 던지기 위해 이런 일상오브제들의 변형과 겹침을 끌어드리었는지에 기인한다. 어쨌든 이 비합리적인 왜곡된 형상들; 일그러진 기물, 일그러진 그림자의 시각적 불편함이 작가의 철저한 의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이 낯선 대상을 ‘오브제 a'로 설명한다. 허상의 사물과 그림자라는 동질의 2중주 속에서 이 어색한 불편함을 그녀가 어떻게 풀어갈지가 숙제다. 얼핏 강박적일 정도로 엄격한 자기 논리의 틀에 갇히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이 말의 해법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더 깊숙이 빠져보는 외길이 있고 다른 쪽은 자기 논리의 룰에서 해방되어보는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예술이 지향하는바 미학적 탐험의 길은 무궁무진 열려있다. 예술가들이 빠지고 싶어 하는 그 신비의 은밀한 황홀함을 이 차가운 지적 예술가는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형이상학적 경험’을 떠 올리게 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경험’이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라고 보면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단지 ‘보여질 수만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이론화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화는 언어가 조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역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윤미의 공간은 형이상학적 경험을 요구한다. 따라서그녀가 제시한 우리 시대의 예술이 품은 공간에 관한 또 다른 내러티브의 문맥을 이윤미는‘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공간의 관념적 틀을 넘나드는 사유의 논리는 작가 이윤미의 몫이다.
 
조형예술학(pratiques et théories)박사 김주영
여러분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세요? 작가정보 페이지 이동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댓글(0)

현재 0byte/ 최대 500 byte

등록

Quick Pag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