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ve

검색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거룩한 풍경의 이면

1

옥정호는 최근 갯벌에서 놀았다. 강화도 갯벌에서 요가를 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옥정호가 뻘밭에서 한 요가는 놀이다. 그 놀이에는 의미가 없다. 풍자여도 좋고 아니어도 좋으며, 은유나 상징이어도 아니어도 그만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가장 그럴듯한 것은 문자 그대로 뻘밭, 그의 표현을 빌지만 진흙탕에서 노는 일이다. 그는 뻘밭에서 요가를 한 것도 어느 날 친구와 낮술을 먹다 갑자기 난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뻘밭은 단순한 진흙탕이 아니다. 느리게 빠져 들어가는 수렁과 같다. 뻘밭은 처음에는 단단한 듯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깊이 빠져들어간다. 나중에는 한 발을 빼내기 조차 힘들어진다. 물론 그것은 뻘과 물과 모래가 섞인 비율과 점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서 아무도 뻘밭에서 요가를 하지 않는다. 체조도 하지 않는다. 그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해병대와 같은 군인들이나, 연예 오락 프로그램, 병영체험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뻘밭은 놀이와 생산의 장소이다. 갯지렁이부터 꼬막에 이르는 수많은 해산물의 서식지이고, 칠면초와 퉁퉁마디가 사는 장소이며, 나처럼 서해 섬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놀이터이다. 바닷물에서 헤엄을 치고, 뻘에서 뒹굴고, 미끄럼타고, 성을 쌓고, 둑을 막고, 숭어새끼와 모시조개를 잡는 놀이 까지 할 수 있다.

옥정호의 요가는 <안양 무지개> 연작에서도 등장했었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 상징적 기호였다. 그가 몸으로 쓴 그 기호들은 주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비웃고, 냉소를 보내는 장치였다. 광화문이나, 안양천, 천안문 등의 장소에서 중국과 한국의 엄숙한 권력과 자본의 기호들 사이에 끼어 도드라지게 튀면서 그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옥정호의 이런 작업 스타일은 요가 이전에도 영어마을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욕망이 예민하게 드러나는 곳에서 설치와 퍼포먼스, 사진 찍기 등을 통해 지속 되었다. 그가 뻘밭에서 한 요가는 이러한 퍼포먼스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면서도 다르다. 그 다름은 장소와 퍼포먼스의 성격에 있다.

2

뻘밭이라는 장소는 이전까지 옥정호가 사진을 찍던 곳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뻘밭은 인간의 손이 가지 않는 천연의 장소, 권력과 자본의 기호에서 일단 벗어난 곳이다. 그곳은 자연이 그 원시적인 생산성과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곳이다. 때문에 뻘밭은 인위적 기호로서의 역할보다는 그 원초성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 자연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가, 즉 인간을 지배하려 하지도 않고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침해받고 싶어 하지도 않는 자연의 본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는 그곳에서 순수하게 무게와 부피를 가진 생물의 그것이 된다.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생물처럼 옥정호는 뻘밭에서 요가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옥정호의 요가나 뻘빹이라는 장소가 즉자적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뻘밭이 지금은 보호받아야 하는 지역으로 여겨진다는 것, 자연 그대로라고 인식 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상징과 기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옥정호 역시 이를 눈치 채고 사진 속에 익숙한 기호를 배치한다. 사진 배경에 버려진 듯이 세워진 수퍼마켓에서 쓰는 바퀴 달린 커다란 카트가 그것이다. 그 카트는 당연히 수퍼마켓, 소비, 자본, 신자유주의 등등의 일련의 의미 사이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카트는 비어있고 뻘밭에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코믹해진다. 단단한 땅에, 평평한 포장 도로위에서 잘 굴러가는 바퀴 달린 금속제 카트란 뻘밭에서는 짐일 뿐이다. 수사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수미쌍관 법이다. 옥정호의 요가 또한 뻘밭에서는 무용지물, 인간의 육체는 그 곳에서 짐일 뿐이기 때문이다.

옥정호는 그의 이번 작업에서 최대한 의미를 털어내고 사진이 가진 재현성과 현장성에 집중하려 했다고 말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기호적 상징성이 아닌 육체와 뻘밭이 가진, 혹은 뻘밭에서 자신의 몸이 남긴 흔적과 자세에 초점을 맞췄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의 요가는 언어적 기호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가장 순수한 형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이율배반이 가능한 것은 요가라는 것 자체가 문화적 코드이자, 인간의 육체를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짐작이긴 하지만 인도에서 요가가 발명된 까닭은 아마도 비일상적인 육체적 수련과 명상을 통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육체와 삶과 세계를 되돌아보게 하는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장소로서 뻘밭은 사실 요가와 무척 잘 어울리는 곳이다. 옥정호가 차려 입은 양복과, 뻘밭이라는 장소와, 요가라는 신체 기호의 만남은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 泥田鬪狗이니까.

3

옥정호의 또 다른 사진인 풍경들 역시 그가 추구해오던 현실의 아이러니, 이해할 수 없는 일상적 기이함과 뒤틀림에 대한 진술이다. 진술 방법은 좀 더 객관적이 됐고 그럼으로써 설득력을 얻는다. 그가 선택한 현실의 프레임들은 현재 우리의 삶을 재현, 문자 그대로 리프리젠테이션 representation 한다. 나란히 놓인 낚시터 좌대와 야영장 텐트, 부두의 컨테이너와 크레인, 성벽과 교회 첨탑 등은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진 사물들이 이뤄낸 외견상의 상사를 보여준다. 그 상사를 가능케 하는 배후를 알아내는 것은 기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이 독해를 위해 옥정호는 이미지의 비교 혹은 자연스러운 대조라는 코드를 사용한다.

하나는 수평 방향이고 다른 한편은 수직 방향이다. 수평 방향은 원본 없는 반복으로서의 재현이고, 수직 방향은 높이에 따라 드러나는 세계의 위계적 구조를 보여준다. 수평적 비교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인 풍경을 멀리서 찍은 것과 그 디테일을 비교 가능하도록 배치한다. 예를 들면 야구장이라는 스포츠 경기장과 경마장이라는 공인된 도박장에 모인 사람들의 집단과, 그 집단의 세부이다. 옥정호에 따르면 야구장과 경마장의 긴장도와 집중도는 차이가 많이 난다. 야구장은 승부의 호흡이 길고 사람들이 비교적 느긋하게 경기를 즐기지만, 경마장은 돈이 오가고 아주 짧은 순간에 승부가 결정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유사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다름을 같이 보여주는 것은 사진만이 가능한 일이다. 즉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카메라의 시각, 사진으로 보아야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맨눈으로 세계를 별로 잘 보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다 더 흥미 있는 것은 수직적 프레임이다. 연속 촬영 후 사진을 합성해 트리밍한 그의 수직 사진들은 일반적인 사진의 좌우로 긴 파노라마적 시야와는 다른 세계를 제시한다. 수평적 파노라마나 기본적 프레임들이 인간의 시선 방향과 자연스럽게 일치해 넓이와 길이를 보여준다면 수직적 프레임은 세계의 층위와 수직적 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과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가 각각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재현, 반복 되고 있다는 우리 삶의 풍경의 날카로운 절개면이다.

하늘에서부터 지상에 이르는 수직적 절개면의 높은 곳에는 이념과 상징적 기호들이 있고,아래로 내려오면 일과 짐과, 무거운 일상이 놓여 있다. 예를 들면 위쪽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아래쪽에는 공원이 있는 풍경을 보자. 국가의 상징이자 이데올로기적 표상으로서의 국기는 위쪽에 아래쪽에는 평안한 공원의 일상이 있다. 아래쪽만 바라보면 공원은 공원 이상의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은 공원이라는 장소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며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밝힌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세계의 토대와 상부구조를 수직적 틈새를 통해 들여다봄으로써 그 전모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수직적 풍경의 또 다른 재미는 일상적 고도가 역전되어 나타나는 경우이다. 항구 사진과 등산객이 등장하는 사진이 그 예이다. 두 사진 모두 눈앞에 가까운 곳이 물리적 고도가 높은 곳인데도 그것들이 뒤집혀 나타난다. 그 역전은 수직적으로 구성된 좁은 시야와 인간의 이미지 읽기 관습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착각이 진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실일 수도 있다.

4

옥정호의 사진은 현실과 개념적 퍼포먼스의 틈새에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퍼포먼스와 놀이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사진적인 어떤 것을 건지려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이제 개념적인 퍼포먼스를 벗어나 보다 사진적인 것 또는 사진 자체의 즐거움에 접근하려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금의 작업들이 출현했다.

그는 현장의 디테일을 최대한 살려 담기 위해 고해상도 카메라를 사용했다. 이러한 시도는 디테일, 자세한 묘사가 그의 작업에 필요했다는 의미이기도하다.(이 글을 쓸 때는 작품용 프린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때로 사진의 디테일은 그 자체로 발언권이 너무 세서 작가의 의도를 벗어난다. 그리고 의도를 거스르는 사진의 우연성이 바로 사진의 핵심이기도 하다. 왜냐면 대상을 완벽하게 잘 찍으려는 사진가의 의지, 의도와 그것을 무시하는 우연이야 말로 사진에 긴장감을 주는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옥정호의 이번 작업들은 그가 말하려는 바를 직접 떠들기 보다는 우회적으로 아니 현실이, 이미지가 말할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뻘밭과 우연히 마주친 현장들이 입을 열게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사진을 그냥 사진이게, 이미지를 이미지이게 내버려 두면서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변모는 주목할 만하다. 아직도 그림을 상징과 기호의 하위 수단으로, 이미지를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대우하는 인식들 속에서 그의 작업에 기대를 걸게 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아직도 그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어느 길을 갈지는 모른다. 계속해서 뻘밭을 기어갈지, 사대강을 따라 달려갈지, 혹은 앉아서 공중부양을 시도할지.....
어쨌든 옥정호는 운다. 울음이 그의 작업이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모른다. 아마 그도 모를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근본적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를 울리는 것일까. 그게 정답일까? 사진 속의 동영상 마크는 울음이 현재 진행형임을 말해준다. 그는 제스처를 버리고 그냥 운다. 적나라하다. 아마도 그 적나라함이 옥정호가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강홍구



여러분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세요? 작가정보 페이지 이동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댓글(0)

현재 0byte/ 최대 500 byte

등록

Quick Pag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