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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벽 아래서 자유를 그리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59)은 말한다. “신의 섭리는 인간을 전적으로 독립적이지도 전적으로 자유롭지도 않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의 주위에는 그 누구도 넘어갈 수 없는 숙명적인 벽이 있다. 그러나 그 넓은 벽의 테두리 내에서 인간은 강력하며 자유롭다.” 이상선이라는 인격을 대할 때마다 또 그의 회화 작품과 마주할 때마다 토크빌의 준엄한 명제가 떠오른다. 이상선은 주제는 언제나 현실의 벽에 갇힐 수밖에 없는 고된 인생살이 속에서 피어 오르는 일말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상선은 세상을 보려는 관찰자가 아니다. 세상을 발견하려는 발견자이다. 단순히 보는 것은 세상 속을 그저 유영한다는 뜻이며, 발견한다는 것은 세상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관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정립시킨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의 차이다. 특정 모티브로 자기 상표를 등록하는 여타 다른 예술가들과 다르게 이상선은 세상살이가 곧 주제가 된다. 그가 접하는 일상의 세상살이, 그 온갖 풍경들을 가슴에 담고 다시금 화면에 배치한다. 낮은 명도와 채도의, 큰 붓으로 호방하게 덧칠한 배경 앞으로 순수의 표정이 관람객에 말을 걸며, 들꽃들은 화면에 난분분 난분분 떨어진다. 이상선의 습윤한 붓질은 젊음의 맛이며, 화면의 들꽃들 역시 봄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아이들의 표정과도 어울린다. 다만 이러한 분위기와 서로 상충하는 낮은 채도와 명도의 배경처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음울한 메타포인가, 아니면 아이들의 미소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려는 대조의 극화된 연출인가?

이상선은1969년에 태어났다. 그가 대학생이 되어 세상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풍이 대학가를 휩쓸었다. 반공 군부독재 이데올로기의 화마가 자유, 인권, 인본주의에 대해 눈을 떠가는 젊은 세대의 희망의 활기를 위협했다. 군부독재의 존립근거는 철저한 반공이었다. 따라서 군부독재에 맞서는 방법은 이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칼 마르크스의 이론서나 소비에트, 중국 등 사회주의권의 정치 외교 실태를 파악하는 것과 함께 남미의 해방신학, 체 게바라의 소설 같은 삶을 독서로 접하는 통로였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는 일대 충격을 야기시켰다.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방의 성과가 소위 태자당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특권계층에게만 흘러갔고 이에 격분한 중국의 학생들이 만든 성토의 집회를 총칼로 진압한 것이다. 마치1980년 한국과 유사한 사건이 사회주의의 나라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세상사람들이 모두 충격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잇따라1990년10월에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었으며1991년12월26일에 소비에트는 자기 체제를 향해 스스로 종언을 선고했다. 이후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은 크나큰 곤혹을 겪었는데,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전면적 수정이 불가피했고 현실과 이상주의를 절충하거나 감각적 환락으로 도피하거나 하는 선택을 강요 받았다. 1990년대는 놀라움이 연속되던 시대임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동구권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학생운동이 방향을 잃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지키지 않았던 민정이양(民政移讓)의 약속은1993년32년 만에 국민들 스스로 이루어냈다. 이후 희망의 문민정권은IMF 사태로 파국을 맞는다. 국민의 대다수가 신자유주의야말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로 인식했으며 폭스 아메리카의 위용을 실감했다.
상기한 분위기는 예술계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서구 형식주의 미학을 한국적 담론으로 변형 수용했던 모노크롬, 미니멀리즘, 추상 표현주의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대한 대척점으로서 사회적 리얼리즘 및 한반도 토착사상을 절충시킨 민중미술이 위세를 키워갔다. 한마디로 이치관념(二値觀念)의 시대였다. 그런데 해외여행 및 유학 자율화가 시작된1985년 이후 서구 신사조를 받아들인 유학파1세대가1990년대 초반 대거 국내로 유입되고, 사회주의 세계가 전반적으로 몰락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양대 산맥에 지각변동이 불가피했다. 유학파들은 당장 서구에서 유행하던 미디어 아트, 설치미술을 유입시키면서 붐을 이룬 가운데 사진 매체마저 미술계 내부를 당당하게 잠식했으며, 소위 ‘신세대 미술’로 알려진 신진 세력은 기성의 모든 세력과 가치에 야유를 퍼붓듯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형식을 쏟아냈다. 진정1990년대는 미술계에서 새로운 운동이나 가치를 찾는 끊임없는 모색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하나 둘로 응결되었던 이전 시대의 에너지가 다원적 개인주의로 확산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였다.

“그림이 인생의 전부라고0.1초도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는 이상선의 자신감 있는 어투는 근자에 들어서서 미술가들 사이에서 제법 회자되는 말이 되었는데, 물론 이는 붓질하는 순간의 즐거움이나 형식 완결의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삶을 예술에 송두리째 반영시켰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어투이기 때문이다. 이상선은 경주에서 한학적 기풍이 여전히 살아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이상선은 남자의 길이란 세상 도처에 널리 뻗는 자기의 뜻이며 인본주의를 완성해 가는 여정이라고 교육받았으며, 나라의 전환기(1989~94)에 학생 시기를 맞이한 그가 자기 취향이나 자기 안위보다도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정치 사회적 화두에 관심을 더 기울인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상선은 자기 형식의 발현보다도 세상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했던 당시의 절박함에 대해 곧잘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국내 민정이양의 성과와 외국에서 들려오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주의의 시작은 자유주의적, 인권주의적 사상의 집결을 상당부분 와해시켰으며, 이에 따라 젊은 세대들은 일대 공황을 느끼거나 신경질적 강박에 빠졌고 자기 부정을 일삼았다. 이러한 병리학적 정서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문화를 감각적으로 향유하며 댄디즘을 받아들이고 프리 섹스를 허용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이상선은 민주화 세대의 여울 끝자락에 떠밀려 감각의 해변으로 쓸려온 보석이다.

이후 이상선은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독일에서 무언가 새로운 철학이나 형식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자기를 확인하러 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때 리히터(G. Richter)나 임멘도르프(J. Immendorff), 토마스 루프(T. Ruff), 펭크(A. R. Penck)와 같은 독일 거장들을 만났고, 이상선은 스승으로서 스파뇰로(G. Spagnulo) 교수를 택했다. 스파뇰로 교수는 이상선에게 철저히 한국적이며 자기 현실의 토양에서 발아한 자기 인생을 그리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독일이라는 풍토에서 이상선이 받아 들은 정신적 태도를 요약하자면 간략히 다음과 같다.

어떤 형식의 예술이 그 형식을 발현 시킨 예술가의 인생과 일치했을 때, 그리고 그 예술이 인생의 험난한 여정의 시행착오로 빚어낸 결과였을 때 비로소 예술은 진정성을 얻는다. 또 하나, 기존의 예술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존 예술과 지난 시대 사이에 엄존하는 내적 필연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명찰한 연후에 자기의 인생과 자기가 속한 시대의 내밀함을 꿰뚫어 형식으로 발현하려는 태도를 우리는 아방가르드 예술 정신이라고 상기한다. 이상선은 이 두 가지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대전제를 스파뇰로 교수 이하 독일의 거장들의 태도를 통해 부단히 연마했다. 마지막으로, 이상선은 카를 만하임(Karl Manheim)의 유명한 테제에 대해서 언제나 상기한다. ‘사유 존재의 구속성(Seinsverbundenheit)’이 그것인데, 이 말은 행동하는 주체는 그가 뿌리내린 토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지닌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자에게 그런 일은 물론 없겠지만, 사회과학자나 철학자, 문화사가, 사상가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주어진 숙명이며 예술가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성질이다. 그러나,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본질을 학적 시스템으로 구축하려는 철학자나 사상가에게 ‘사유 존재의 구속성’은 치명적인 독이지만, 한 시대라는 벽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한 시대라는 토양에서 발아한 한계치의 영양분으로 꿈꾼 이상이 형식이 될 때 ‘사유 존재의 구속성’은 치명적인 독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시상(時狀)이 되며 세기를 넘는 공감이 된다.

이상선의 예술 작품은 단순한 자기 즉흥이나 감정의 발현이 아니다. 시대를 넘으려는 허황된 시도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해외의 거장의 운필이나 형상, 채색법을 흉내 낸 적도 없다. 자기가 걸어오며 느꼈던 희로애락을 추억하면서 동시대의 모든 소식과 보이는 모든 풍경을 감싸고 싶은 시인 같은 마음을 품었을 뿐이다. 이상선의 자아가 확립된90년대는 동시대 젊은이들이 정치적 긴박함에서 문화적 태평성대의 향유로 그 이상의 궤적을 옮기던 시기였다. 국내 가요 시장 규모가 팝 음악 시장보다 커진 시점이며, 해외 영화보다도 더 잘 맞을 우리 감수성이 구현되는 영상이 가능함을 조금씩 인지하던 시기다. 해외 여행을 해보고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식의 체념도 이 시기부터 사람들의 뇌리 속에 구체화되어 갔다. 적어도 잘 한 일이 있다면 문화적 사대주의가 독약이라는 사실을 조금씩은 알아갔다는 반성,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만큼은 시대적 요청으로부터 역류했다. 서구의 형식과 해외 비엔날레의 일면에서 무언가 힌트나 요행을 붙잡으려는 미술가가 부지기수였다. 남들이 설치미술, 미디어 예술 등의 해외에서 각광 받는 유행의 기제(機制, mechanism)에 집착할 때, 이상선은 한국의 삶을 그렸다. 이 땅의 현대미술가들의 정신이 뉴욕과 런던, 파리, 그리고 동경을 유영하고 있을 때, 이상선의 시선은 동네 놀이터나 공터, 시장바닥과 공원, 아파트 벤치의 사람들의 모습에 꽂혔다.

이상선의 화면에 난분분 난분분 어지럽지만 달콤하게 시야를 가리는 들꽃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들꽃은 보호하고 가꿔주어야만 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척이나 황량한 들판을 마치 천국인양 뛰노는 아이들의 강인한 순수성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표정만을 집중했을 때 그 표정과 얼굴이 무척이나 밝고 온화한 데 반해, 뒤로 물러나서 화면 전체를 바라볼 때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기보다는 조금은 어둡고 어른처럼 세상을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뒤바뀐다. 누군가 이상선의 회화를 가리켜 ‘드라마 없는 기교가 아니라 무기교의 드라마’라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즉, 이상선은 아이들을 점점 어른처럼 만들어가는 동시대에 관해 그린 것이다. 현재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자기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에 아들 옆을 늘 친구처럼 지켰던 그였다. 이상선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아들이 자라면서 성장해가는 궤적의 상을 관찰하면서, 또 아들의 친구로서 본인이 아들의 시대에 의도적으로 귀속됨으로써 젊은 세대로부터 떠밀리지 않고 젊은 세대의 참여자가 되어온 것이다. 이상선의 회화가 믿기지 않게 젊은 이유는 그가 자기의 삶 자체를 ‘드라마 없는 기교보다도 기교 없는 드라마’로 살려는 낭만적 태도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자기의 삶에 아들의 삶, 그리고 동시대 아이들의 삶을 투영시켜 세상을 바라보려는 태도 덕분이다.

이상선은 이상 시인 시집 읽기를 수없이 거듭했으며 ‘오감도 시 제1호’의 시어 ‘아해’를 자기 회화의 제목으로 삼았다. 1930년대 경성의 시대분위기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가 종국에 이르러 군국주의의 악령으로 이행하던 때이다. 이상의 ‘아해’ 속에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이분법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무서운 아해가 그 대립을 전적으로 통제한 일방적 게임이었다. 그러나 무서워하는 아해가 공포의 실체에 대해 용감하게 맞서고 자기의 가능과 한계의 범위를 공명정대하게 파악했더라면 현재의 트라우마가 이토록 깊진 않았을 것이다. 2000년대의 서울 역시 태평양 건너의 더욱 거센 공포의 무서운 아해가 세계를 자기 이해관계의 합, 부합이라는 이치관념의 원칙대로 갈무리하는 현실에 포위되어 있다. 그 무서운 아해와 그 친구들은 서구 중심주의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재단(裁斷)한다. 이상 시인의 비극을 치유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서운 아해가 하는 놀이보다 더 아름답고 인간적인 놀이를 창출해야만 한다. 그것은 이상선처럼 우리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왔는지 전지구적 평화를 위한 우리의 미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의 정서에서 창발(創發)된 수많은 노력들이 오리엔탈리즘을 넘는 보편타당의 전형이 될 때까지 말이다. 이진명,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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