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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각적 경험이 선사하는 
가볍고, 흥미진진하며, 때론 짜릿한 심미적 쾌(快)



1.
 윤기언의 그림에 다가서면서 우리는 시지각적 경험이 어떻게 군침이 도는 심미적 묘미로 화하는지에 관해 알게 된다. 단언하건대, 눈은 결코 사물의 외관을 확인하기 위해 부득불 주어진 도구적인 기관 이상이다. 

 몇 발자국 떨어졌을 때, 윤기언의 이미지는 단지 구슬들을 꿰어 만든 두 개의 목걸이거나 평면 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동그랗고 작은 일련의 패턴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향해 한 두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것들은 예기치 못했던 마술이 되어 시선을 붙잡는다. 가까이 다가섰을 때, 그것들은 더 이상 모두가 동일하며 중성적이고, 무표정한 기하학적 도형이 아니다. 그것들 하나하나는 표정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사람의 얼굴로 화한다! 심술궂은 얼굴, 잔뜩 심통이 난 얼굴, 호쾌한 웃음과 불만, 그리고 꾸벅거림까지… 다만 작은 동그라미들에 불과했던 것들(그들) 모두는 정교하게 울거나 웃고, 시무룩하거나 지루해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단지 비정형의 윤곽을 지닌 작은 입자처럼 보였던 것들은 만발한 국화송이가 된다. 반면, 하나의 커다란 꽃봉오리를 묘사한 듯 해 보이는 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손짓언어들의 군집임이 드러난다.

 관객들은 자신이 인식적 차원의 오류를 범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시지각에 관련된 게임에 초대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결국 작가의 의도는 적중됐고, 그들은 그가 의도한 덫에 걸려든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어떤 거짓에 넘어간 것과 같은 기분상하는 종류의 것과는 무관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속음’의 경험은 관객들에게 매우 심미적인 것으로 소통된다. 관객들은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바짝 다가서 그 세부를 요모조모 살피기를 되풀이하면서, 그 같은 경험을 - 덤덤하게 말하자면 시지각체계의 어떤 조건적 한계와 관련된 경미한 오류와 관련된 그 경험- 거부하기보다는 기꺼이 즐긴다.
 이는 우리의 지각체계가 지극히 협소한 조건들의 조합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 즉 그 예민한 조합의 범주 밖에서는 결코 세계와 만날 수조차 없다는 명백한 한계에 대한 존재론적 차원의 자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이러한 자각의 경험이 심미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심미성은 우리의 자아가 끝없이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 곁으로 가까이 나아갈 때 가슴으로 전해오는 심오한 느낌이다. 우리의 둔해진 감각이 각질을 벗고, 예민함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내적인 충만함의 경험이다.(…) 이처럼 심미적 추구는 진리의 추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을 추구하는 성찰의 심오한 감각이 회복되고 고양되는 경험과 무관치 않다.”

 이처럼, 윤기언의 작업은 우리 시지각의 한계를 즐겁게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미학적 효용성을 지니는가에 대해 일깨워준다.


2.
 윤기언의 <운동>연작은 형상의 부재에서 형상이 만들어지고, 부재 속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단면을 보여준다. 부분들이 전체가 되고, 전체는 다시 부분들로 분할되고 연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형상은 비형상적인 실현들 속에서 잉태되고, 불확정성적인 차원으로 존재한다. 선들은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면서 때론 동일한 질서체계를 따르는 동심원구조를 만들기도 하고, 어느덧 사람의 얼굴과 신체를-또는 그 일부를- 만들기도 한다. 조형적 자유분방함이 어느새 닫힌 이미지의 필연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부재와 현존, 비형상과 형상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윤기언의 세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윤기언의 그림에서 형상과 비형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사실과 패턴의 경계 또한 분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미지가 질서고 이미지의 부재가 무질서라는 식의 이분법 또한 통용되지 않는다. 패턴적인 질서가 선호되는 동시에, 사람들의 전혀 일목요연하지 않은 각양각색의 내면 또한 탐구의 대상이 된다. 동그라미라는 기하학적 질서와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는 천태만상의 표정이 하나의 신체 안에 동거한다. 차가운 도형에 실존의 온갖 뜨거운 지표들, 표정과 스타일과 감정의 편린들이 오버랩된다. 도상과 심리, 초단순성과 복잡계가 하나의 동일한 정체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윤기언의 세계는 화해하기 어려운-어렵다고 간주되고 있는- 두 세계의 상극이 소음없이 해소되는 한 방식을 소개한다. 대척점에 있었던 두 세계 사이의 모듈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상쇄시키는, 냉담과 적대주의의 방향이 아니다. 이로서 우리는 윤기언의 융합적이고 상보적인 접근이 기실은 매우 전통적이고 심오한 미학과 영감의 원칙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학의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에 따르면, 창조적 영감은 언제나 상호 무관해 보이거나, ‘비정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추구되지 않는 두 질서의 관계를 유추해내는 것과 관련있어 왔다. 물론, “창조는 언제나 비정상을 불신하는 인간의 버릇 때문에 저해를 받아왔다.”(부르스터 기셀린,Brewster Ghiselin) 예컨대, 조르주 루오 같은 화가만 하더라도, 언제나 지각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해 눈을 크게 여는 것과 그 지각 가능한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보기 위해 눈을 감는 모순된 두 세계 사이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는 유물론자-리얼리스트들이나 관념론자-추상주의자들 같이, 한쪽으로 경사된 사유의 주관자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조화와 균형의 차원이다. 
 

3.
 진실을 다루기 위해 늘상 심각해야 한다는 것은 균형을 잃은 세대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웃음과 흥미를 지적 천함으로 분류하는 행습도 유감스러운 오류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지독한 오해는 예술이 언제나 도를 넘어 앞으로 튀어나가야 한다는 맹목적인 미학적 급진주의다. 미술대학의 조각 전공자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클레이 애니메이션 <웰레스와 그로밋>(1997, 90분)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닉 파크(Nick Park)는 그가 미술대학에서 언제나 들었던 다음과 같은 강령을 환기한다 : "보다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고 당신의 예술에 대해 그럴 듯한 말을 붙이라는 압력 같은 것을 항상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세기의 수십 년 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미술대학에서 우리가 만나왔던 예술수업의 관행적인 풍경에 다름 아니다. 이런 류의 편견과 오해가 추방해온 값진 것들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다행스럽게도 윤기언의 세계는 이 시대의 폐해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작가는 시각적인 쾌가 품위를 잃지 않는 즐거움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 이처럼, 이념적 급진성에 몸을 맡기거나, 말초감각이나 벅벅 긁어대지 않으면서, 그리고 관념의 늪지에 숨지도 않으면서 지각의 점잖은 유희를 제안하는 것이 무엇보다 윤기언 작업의 매력이다. 원죄감 없이 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 일테면 시지각의 가능성과 한계의 경험이 제공하는 성찰과 심미성의 변증적인 게임에 기꺼이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실해온 것이자 다시 복원해야 할 지표로서, 지금과 같은 미적 재난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직은 충분히 아름답고, 존재와 사물들의 사이에서 발견을 기다리며 남아있는 유추의 빈 공간들은 무궁무진 널려 있다. 시간과 사물들의 세계는 여전히, 아니 더욱 절실하게 자신을 탐색하고 탐미할 창조적인 영혼의 소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들이 아직 드러내지 않은 의미들, 자신만이 그 원료가 되어 생성해낼 수 있는 독특한 미지의 내러티브를 선보이기 위한, 예기치 못한 만남의 계기들을 고대하고 있다. 윤기언은 지금 동그라미와 심리학 사이의 어딘가로 난 하나의 오솔길을 실험하고 있지만, 직사각형이나 아라비아 식 무늬가 그 원료라 한들 또 어떠랴? 

 이러한 길로 나서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생의 조건들을 깊이 긍정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윤기언의 세계 앞에서 관객들은 어떤 이념적 동조를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는, 특히 이 시대에는 드문 미학적 가벼움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지식과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 뭔가 난해한 주석들이라도 끄집어내야 하리라는 타자화된 긴장감에 자신을 내어줄 필요도 없다.

 윤기언의 예술은 난해한 관념이나 급진적 이념, 미학적 도그마의 표방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편하고, 가볍고, 흥미진진하며, 때론 짜릿하기도 하다. 우회적인 성찰이 빗은 심미적 쾌가 있고, 이 모든 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그의 ‘화가-장인’으로서 뛰어난 솜씨가 있다. 윤기언이 이 기름진 영토에 또 어떤 식물들을 심고, 경작해 나갈지를 기대해보아도 될 이유는 이처럼 충분하다.

심상용(동덕여대교수, 미술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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