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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촉감 - 노충현의 몸에 닿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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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충현의 그림은 초기의 소재로 되돌아갔다. 그는 한번 떠난 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린다. 그 동안 기후는 바뀌었고 대상의 폭은 넓어졌다. 건조하고 공기조차 없는 것 같은 날씨에서 스모그와 황사와 시멘트 가루가 자욱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물기 있는 눈이 내리지만 그 조차도 화산재처럼 보인다. 내면이 변한 것일까. 세계가 변한 것일까. 둘 다일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들의 궤적을 보면 분명해진다. 초기의 <살풍경>, <자리> 연작에서 <실밀실>을 거쳐 다시 <살풍경, 자리>의 소재들로 돌아왔다. 그가 바라본 풍경에서 수집된 풍경, 상상된 풍경, 공적 풍경들로 갔다가  다시 몸으로 직접 부딪힌 풍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되돌아옴일까 아니면 재탐구일까? 내가 보기에는 재탐구에 가깝다. 그리고 그의 그림들은 더욱 육체적 혹은 공감각적이 되었다. 시각은 촉각을 부르고 같이 모여서 청각적 효과를 낸다. 그의 그림에서는 소리가 들린다. 눈, 비, 황사, 시멘트 가루, 먼지 같은 것이 조용히 쏟아지는 소리이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거의 침묵에 가까운 흐릿한 소리, 보다 희미하고 납작해진 그림. 그의 회화는 그러니까 시각 중심적이 아니다. 시각은 다른 감각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풍경이지만 느끼는 것은 촉각이거나 청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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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보기에 노충현의 그림은 재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사실상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그림은 소재와의 관계에서 유사가 아니라 상사에 가깝다. 유사 resemblance는 원작과 복제 사이의 위계를 함축하고 있어서 원작과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하지만 상사similtude 는 원본 없는 복제들 사이의 닮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 원본과의 닮음과 관계없이, 원본을 증언할 필요 없이, 반복적 놀이를 하는 것이 상사이다.

 노충현이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맨눈으로 대상을 본다 해도 결국 모니터와 인쇄된 이미지라는 재해석된 정보가 그의 그림의 소재가 된다. 그는 눈으로 현장을 보고 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잡지, 신문, 인터넷에 실린 사진을 발견한다. 그 이미지들을 프린트 하고, 프린트한 이미지를 그린다. 아니 정확히 프린트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가 그리는 이미지는 사실 위에서 말하는 과정 모든 곳에 있고 어느 곳에도 없다. 이 역설이 가능한 것은 화가들은 이미지에 의해 그리고 싶은 욕망을 촉발 받고 느끼지만 도달하는 곳은 원본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어떤 곳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곳에 도달할 지도 모르기까지 한다. 더 심하게 말하면 화가들은 무엇을 그리게 될지 몰라야만 한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노충현의 그림은 원본으로부터 점점 벗어나 걸어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좀 이상하기는 하다. 그의 그림은 무엇을 보여 준 다기 보다 오히려 스스로 무엇을 보고 싶은가,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묻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여기 철지난 수영장이 있다. 눈 내리는 길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테니스 코트가 있다. 전선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회화가 매력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막연한 느낌과 무엇인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화가는 붓을 들고 물감을 칠한다. 사실 화가가 하는 일은 그것이 전부이기도 하다. 무엇을 볼 것인지 명확해지는 순간 그림은 끝나거나 무의미해진다.

 노충현의 경우 보고 싶은 것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시각적 이미지인 풍경들은 촉각적, 청각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풍경들이 갖는 질감과 촉감들은 까칠하다. 동시에 뭔가 연약한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드럽게 뭉개지는 그런 연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부스러뜨리면 조금씩 바스러지는 오래 된 시멘트 벽돌이 가진 다공질성에 가깝다. 때문에 건조하고 까실까실하다. 그가 그것을 보고 싶었는지 아닌지 모른다. 아니 관계없다. 우리가 보려는 것은 그가 그걸 알고 있는지 아닌 가가 아니다. 
 
  노충현이 그린 풍경들은 지리적으로는 도시의 중심에 있지만 역할과 위치는 변두리이다. 유원지, 주차장, 한강변, 수영장 등등. 그 장소들은 생산과 유통의 과정을 살짝 벗어나 있다. 그가 그린 장소들은 잉여의 공간이다. 직접적인 생산과 관계없으며 놀이와 휴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노충현이 그런 공간을 선택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공간의 성격과 더불어 장소를 구성하는 요소들 때문이기도 한다.
 
 노충현이 그린 장소들은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수영장은 수영장이라는 것을, 주차장은 주차장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수영장은 물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수조와 구조대와 파라솔을 비롯한 부속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장면은 영업이 끝나 사람들이 없는 시간이다. 수영장을 관리하는 누군가 남아 정리나 청소를 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일종의 수영장의 구성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관점에서 그려져 있다.

 이 장소들의 비어있음, 공허함, 드라이함은 <실밀실>의 공적 장소나 <자리>연작의 동물원, 이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그는 이러한 장소들은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동일한 성격을 가진 공간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 그가 그리는 공간은 사적인 장소감Sence of Place이 없거나 불가능한 장소이다. 즉 사유화 될 수 없는 공간들이다. 사유화라기보다는 개인화라는 점이 옳을 지도 모른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정붙일 수 없는 공간들이다. 돌아서면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할 수도 없으며 이 공간 저 공간을 구분할 필요도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 공간. 존재 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공간. 도시의 곳곳에 뚫린 거대한 구멍, 공동 같은 장소.

 사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많은 공간이 바로 공동과 같은 장소이다. 길, 지하철, 공공건물, 놀이공원, 동물원 등등,,,,그 공동에서 사람들은 장소를 의식하지 않고 움직이고, 일하고, 놀고, 잊어버린다. 익숙하고 범상한 장소. 이런 장소들은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스투디움Studium으로 가득 찬 장소이다. 어쩌면 그는 그러한 장소에서 그 만의 푼크툼Punctum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공동, 거대한 구멍에서 바라본 개인적인 무엇인가를 그림 속에서 추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만약 그것이 푼크툼Punctum이라면 그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도리는 없다. 게다가 추정해볼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는 모든 그의 그림들은 그 과정이자 결과의 집합이고 흔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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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충현의 그림은 일종의 흔적이다. 풍경의 흔적, 인간의 흔적, 제도의 흔적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현대의 이미지들은 무엇인가 사라져버린 흔적일 뿐이다.’ 마릴린 몬로가 사라진 흔적, 신화가 사라진 흔적, 자본이 사라진 흔적, 미술에 대한 믿음 따위가 변기 속으로 사라진 흔적일 뿐이다. 노충현의 그림은 물리적으로는 물감과, 붓과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만났다 사라진 흔적이고 그 물감의 궤적은 그가 보았던, 보았다고 생각했던 풍경의 흔적이다. 물감이라는 물리적인 흔적과 그가 본 이미지, 풍경의 흔적은 캔버스 위에서 겹친다. 그 겹치는 지점에서 화가들은 흔들리고 고민한다.

 그 곳이 회화와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들이 갈라서는 지점이다.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흔적이라는 자의식 없이 작가는 작업 뒤로 사라진다. 그러나 회화는 작가를 끝없이 붙잡는다. 캔버스 앞을 떠나도, 작업실을 나가도 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때문에 기이하게도 회화는 서사적 구조를 모조리 배제해도 서사적이 된다. 인간의 흔적 자체가 모여 서사적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말레비치나 스텔라의 작업들도 연속해서 보고 있으면 서사 구조가 생겨난다.

 노충현의 그림도 그렇다. 그가 유사성을 벗어나 재현을 넘어서도 이미지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서사적인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눈 내리는 밤 물 위에 뜬 오리배, 물 빠진 수영장, 수영장을 청소하는 사람의 실루엣, 다시 눈 덮힌 자동차, 전선에 앉은 새... 등등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서사가 된다. 그 서사는 재현을 넘어서기 위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서사적 연관을 파괴해야 한다는 어떤 강령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강령, 원칙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림은 그림일 뿐 격언 같은 문장들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그는 대상을 그리는 방법에서는 재현을 무시- 더 정확히는 무관심하거나 무관심한 척하지만 이미지들 사이의 서사적 연관은 너그럽게 허용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재현적인지 아닌지, 서사적 연관이 있는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실 그의 그림의 서사성 역시 서사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그림이 어디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는 <실밀실>이 보여주던 다소 공공적인 장소와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장소로 되돌아 왔다. 거기서 그는 질문한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날씨가 바뀐다. 눈이 내리고, 으스스하고 축축한 밤이 되고, 날이 흐리다. 그것이 몸에 닿는다. 몸에 닿는 촉감이 그림이 된다. 일단 그림은 끝났다. 끝 난 뒤에도 그림들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정확히 그려진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아주 막연하게 이쪽일지도 모른다고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노충현은 다시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서 길을 묻고 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언제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물론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모르니까 그리는 것이다.

강홍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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