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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삶을 위한 비망록


이재훈의 작업이 주는 이미지는 삭막하다. 그의 화면에서는 스산한 바람과 그 바람에 어울릴 만한 가을 들녘의 마른 풀이 등장하고, 간혹 그곳을 장식하는 꽃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꽃은 발랄함이나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장례식용의 꽃인 양 무겁고 육중하다. 이렇게 납덩이 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이재훈 작품에는 그에 비견될 만큼이나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등장한다.
“선생상”,“학생상”,“영웅상”,“미인상”과 같은 표식이 새겨진 띠로 눈을 가린채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의지로는 무엇을 볼 수도 없고, 하반신을 어딘가에 저당 잡힌 상태인지라 자력으로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단지 놓여진(혹은 버려진) 그 자리에서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깔끔한 외모의 “선생상”은 책을 읽고 있으며, 집지를 허리춤에 낀 외로이 바람을 맞고 서있는 “백수상”은 한껏 쓸쓸한 포즈를 취하고 있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상”과 뭇 남성들을 희롱하는 “미인상”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의 행동패턴을 표방하고 있는 이들 화면 속 인물들은 그러나 인간적 존엄성을 가춘 개별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부품화된 존재로써만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을 통해 우리는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나오는 찰리 채플린을 보며 느꼈던 바로 그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들 인간 군상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을 만연히 그리고 성실하게 수행하였지만 결국 버려지고 만(혹은 버려져야 할) 존재들이며, 버려진 후에도 타성과도 같이 자신들의 맡은바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한편, 이들이 담지하는 무겁고 육중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군상들은 어린시절 가지고 놀던 못난이 목각 인형들처럼 희화화되고 키치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과 작품이 담지하는 넙덩이같은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화면을 주도하는 이미지는 너무도 가볍고 통속적인 인물상들인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 드러내는 이러한 통속적인 인간군상에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납덩이같은 무게감과 중압감을 뒤로한 채 키치적 인간군상이 주도하는 이 세상에 대한 이재훈은 한 가닥 의문을 제시한다. 사회라는 집단적 시스템 속에서 ‘나홀로’의 삶을 통해 자신을 찬아가고 충족시켜 나가는 “글루미 제너레이션”이라는 표식을 근대적인 행동패턴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들 군상과 나란히 혹은 멀찌감치 떨어트려 기념비의 형태로 혹은 팻말의 형태로 새겨 넣음으로써 말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 사회가 커다란 매트릭스 구조 속에 위치하는 의미소로서의 개개인에게 부여한 의미에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휘하기 못하게 된 글루미 제너레이션 세대의 주변을 망령처럼 떠돌고 있는 “하면된다”, “참 잘했어요” 같은 근대적 표제어를 통해 작가는 작품 속 인간군상의 역할 수행에 의문을 가하는가 하면 이들 인간군상들이 내건 가치기준에 조소을 가하기도 한다. 그 결과, 작가는 근대사회를 규율하던 화석화된 가치 기준들을 “비기념비”적인 기념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의 작품을 주도하는 이러한 이율배반성은 〈당신은 무엇입니까?〉와 같은 작품에서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글루미 제너레이션”이라는 기념비와 함께 등작하는 “영웅상”은 글루미 제너레이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이다. 더욱이 그 영웅상이 수퍼맨과 같은 울뚝 불뚝한 근육을 자랑하며 빨간 망토를 휘날리는 하반신 부재의 눈가린 영웅상이라고 할 때는 더욱 더... 이렇게 이재훈은 이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역할과 그 역할을 잉태하게 만든 가치의 비인간적인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화면 속에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조합해 넣고 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중의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이재훈의 작업은 근대적 이데올로기와 동시대를 주도하는 가치기준이 착종된 상태로 등장한다. 얽히고 설킨 작품의 층위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작품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향 지시등을 마련하여 놓음으로써 소통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소통을 의도한 이재훈의 작품에는 정작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 인간들은 눈을 가린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충실히 해내는 박제화된 존재들이며, 설령 눈을 가리지 않고 있다하더라도 주변의 인물과 눈길을 교환하거나 의사소통을 하기 보다는 정면을 향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주변과의 소통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한편 이들 인물상들이 보여주는 소통부재의 상황은 주변과 어울리며 소통하기 보다는 고독을 동반자로 삼고 살아가는 글루미 제너레이션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소통을 원했으되 소통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 이렇게 소통할 수 없게 된 상황은 다시금 이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가 원했던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역설의 역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역설과도 같이 전복을 거듭하게 되고 만다. 뭐가 이렇게 꼬이고 어려운 것인지?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우리들 모두가 근대와 현대가 교묘하게 착종하는 한국적 동시대에 살고 있고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우리네 인생 자체가 꼬이고 꼬인 매듭의 연속인 것을....

글  기혜경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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