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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영의 경계에서

회화의 들러리로서의 사진

송은영의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이 등장한다. 이미 1997년 파리유학시절부터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매개로 한 회화작업을 시작했다. 당시의 작업에서 작가가 주목했던 부분은 작품 안의 ‘시선’이었다. 흑백으로 세밀하지만 건조하게 시각화된 자신의 얼굴에서 유독 시선은 사라지거나 부서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응시를 제거하거나 시선을 제어하는 방식을 차용하면서 욕망의 주체를 지우기를 반복한다. 시선이 사리진 자화상은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관객에게 허공을 응시하게 하는 모호함을 선사했다. 비워져버린 시선은 동시에 관객 자신의 시선을 대입시킬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2000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자화상시리즈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해체의 개념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랩으로 싼 후 사진을 찍었다. 단지 랩으로 얼굴을 두른 것이 아니라 양 손으로 팽팽하게 랩을 잡아당긴 후 찍은 사진이었다. 작가는 이 사진을 격자형태로 세분화한 후 각각의 위치를 재배열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녀의 얼굴은 여러 개의 셀(cell)로 분해가 되고 확장된 화면에 재배치된다(참고그림1). 송은영은 자신의 얼굴을 응용해 다양한 이미지를 생산한다. 초기의 작업은 사진을 찍은 후 다시 회화로 환원하는 시스템, 다시 말하자면 초기 사진의 역할을 재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기 자화상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사진이란 매체의 다양한 속성과 가능성의 실험(찢거나 구기는 행위 뒤에 발생하는 우연의 질감과 이미지의 왜곡같은)은 회화에 응용되거나 때론 이미지를 제시하는 기능을 드러냄으로서 사진의 역할은 가려져있는 듯하지만, 매우 중요한 작업의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더불어, 송은영의 초기작업에서는 매체적 실험보다는 신체-특히 얼굴-의 가능성의 확장이 주로 실험되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겠다. 게다가 그녀는 비디오 작업에서 긴장과 이완, 숨쉬기와 숨 멈추기를 반복하며 랩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참고그림2). 왜 그랬을까? 비디오 속의 그녀는 한참동안 호흡을 멈춘 채 랩 속에 그녀를 가둔다. 그리고 강한 파열음을 내면서 몸의 모든 부분을 이완시키기를 반복한다. 긴장된 상태, 호흡이 멈추면 동시에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실험은 호흡운동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공허한 지점으로 이월되는 듯한 인상을 던져준다. 어쩌면 작가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요가 역시 이러한 문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작가의 초기작업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벌써 십년 가까이 하나의 주제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태도를 소개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 역시 같은 주제를 탐구하되 발전한 형태의 작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송은영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초기작을 읽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사진과 회화의 동거
들러리로만 존재하던 사진은 이제 회화와 함께 둥지를 튼다. 이 말은 조금 우습게 들리지만 작가 송은영이란 이름을 알린 작업은 바로 사진과 회화를 동시에 한 화면 안에 등장시키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울 위에 사진을 인화하고 반대 화면에 회화를 배치시키는 형식을 응용한다. 초기에 랩으로 심하게 왜곡시킨 그녀의 얼굴은 이제 자신을 응시하는 도발적인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녀는 여드름이 난 자신의 얼굴을 거울 위에 밀착시키면서 때론 스스로를 응시하거나 허공을 바라보는 등 사뭇 ‘나르시스적’인 태도의 실험을 시도한다(참고그림3).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드러난 작품은 사진의 결과물과는 반대로 나타난다. 실제의 자신과 거울에 비친 자신은 화면 안에서 반대로 해석되는데, 실제의 자신은 흑백으로 거울 위에 인화된 형태로 남아있고 반대로 거울 속의 자신은 회화로 재현되었다. 그녀는 실제와 환영 사이를 넘나들며 사진과 회화의 전형성을 부정하거나 둘 사이의 미술사적 문맥을 전복시킨다. 화면 속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기호학적인 해석-여성성, 에로티시즘, 나르시시즘-이 사뭇 전형적으로 읽힐지는 모르나, 반대로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해석은 순간 도발성을 띠게 된다. 사진과 회화는 거울 위에 입혀지며 더불어 이러한 물질적 속성은 자화상이자 동시에 타인-거울 속에 비춰지는 세상, 관객-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초기작업에서 보여 지던 성격들은 비로소 시각화되고 독해가 용이한 이미지로 환원된 것이다. 그녀는 화면 안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때론 여신처럼 자신에게 몰두해 있다. 초기작에서 나타난 긴장감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사진과 회화의 경계가 동시에 인접한 나르시스적 작업은 관객과 같이 호흡하게 된다. 관객은 마치 자신이 또 다른 자신(alter ego)과 입맞추는 것같은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 오토에로티시즘은 거울이 주는 환영성이다. 원근법의 모델을 제시한 반 아이크 형제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오목거울의 회화적 위상과 신비감이나 또는 과학적 원근법을 응용한 알베르트 뒤러의 자화상을 통해 우리는 거울과 자화상의 역학관계를 살펴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렇다면 반 아이크 형제의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거울의 의미를 송은영의 작품과 연결시켜 해석해보자. “현미경이면서 동시에 망원경인 거울은 작품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또다른 현실을, 즉 보이는 세계 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한히 작은 세계 안에 무한히 큰 세계를 솟아오르게 하며, 그것은 화가 스스로 자기의 재능을 통해 참여하고 있는 창조를 재현하는 ‘겹치기 구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거울은 또한 “임의적인 틀로 공간을 조직하고 구획하면서 거울은 관점의 상대성을 발견하고, 정신작용의 복합성과 유동성을 복원한다. 그것은 일종의 거울-프리즘으로, 그 안에는 장면과 상들이 쌓이고 또 은유와 기호의 망 속에 그 의미작용이 겹쳐진다.”
송은영의 사진과 회화의 동거는 거울이 지닌 은유성과 사진의 실제성-바로 거기 있음-그리고 회화의 재현성이 중첩되며 발생하는 경계의 공유점이었다.

support/surface-경계 위에서...
사진과 회화의 결합은 다시 사진 자체로서 그리고 회화 자체로서 재등장한다. 그러나 이제 캔버스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거울이 대신한다. 그녀는 이번 전시에서 ‘따라잡기’와 ‘끼어들기’ 시리즈를 선보인다. 회화는 이제 즉흥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녀의 퍼포먼스의 주체도 객체도 연기자도 관객도 바로 ‘자신’이다. 어찌 보면 분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런 작업태도는 초기부터 일관적인 부분이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따라잡는 이 무모한 행위는 결국 모호한 자신의 외곽선을 남긴다.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가 말하는 모든 진실은 어쩌면 찰라의 철학일 것이다. 그녀는 바로 우리 앞에 자신의 존재를 쫓는 부질없는 시도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송은영의 ‘따라잡기’ 시리즈에서의 화면-거울 위에 비친 세상은 심하게 뒤틀린 상을 반영하고 있다. 마치 ‘진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르네상스식 원근법의 공간재현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송은영은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작업에서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봤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따라잡는다. 깊이와 거리를 측정하기 위한 두 개의 눈은 따라잡기 작업을 하는 동안은 시선을 분산시키는 불편한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한쪽 눈을 감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따라 잡는다. 반대로 나머지 한쪽 눈으로 다시 거울에 비친 세상을 따라 잡는다. 결과는 모호한 경계.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인식을 그녀는 이렇듯 거울을 통해 비춰진 세상을 따라잡으면서 찾는 것이다. 그녀의 따라잡기는 무의식적으로 이미 초기에 실험을 한 적도 있다(참고그림4).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슬라이드로 제작한 후 다시 똑같은 크기로 확대해 화면 위에 투사한 뒤 자화상의 외곽선을 따라잡곤 했다. 따라잡는 과정에 그녀는 외곽선과 해체된 자화상의 접합부분의 경계를 표시하는데 이런 방법은 마치 어린이를 위한 그림교재와 유사한 결과물을 생산해냈다.
바로 이러한 방법은 이번 사진작업-끼어들기-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투명아크릴판 위에 얼굴을 밀착한 후 자신의 얼굴을 왜곡시킨 사진을 ‘또’ 찍는다. 그녀는 여전히 호흡을 정지한 후 땀으로 화장이 범벅이 돼 변형된 자신의 얼굴사진의 부분을 확대한 후 거울 위에 인화한다. 그녀의 얼굴은 볼, 입술, 눈, 코 등 해체된 채 변형된 액자 사이에 ‘끼어들기’를 감행한다. 해체된 얼굴 중 투명판에 밀착된 부분의 외곽선은 금색라인으로 강조되어 있다. 거울 위에 인화된 해체된 얼굴은 변형액자 사이에 끼어들면서 액자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때론 살롱을 장식하기 위해 회화는 액자를 통해 장식성을 획득했다. 인간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회화성을 보여준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 회화는 과감하게 액자를 없애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60년대 말부터 프랑스 니스에서 시작된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urface) 운동은 화면의 구성하는 물성 자체를 회화의 틀이자 주체임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송은영의 작업은 위와 같은 미술사적 사실과 그 궤를 같이 함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쉬포르-쉬르파스 운동에서 보여준 실험은 회화의 물질적 틀이 곧 회화의 표면성 또는 이미지 자체일 수 있다는 가설의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송은영의 이번 전시에서의 상(象)과 틀 사이의 위상의 뒤틀림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녀는 경계를 이야기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시각적 한계에 대한 추상적 도전, 혹은 경계에 의해 감춰진 대상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라고 해야 할까. 끼어들기 시리즈를 바라보면 변형된 액자는 굴곡을 이르면서 이미지의 위를 넘나들고, 이미지는 액자 속에 갇힌 것이 아닌 액자를 경계로 한 넘나들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끼어들기 작업에서의 상과 틀의 경계는 단절된 경계가 아닌 연속되어지는 경계임을 확인시켜준다. 즉, 작가가 일관적인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 경계란 부정적이거나 닫힌 의미의 경계가 아닌 확장의 의미이며 더 나아가 연결의 의미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 듯 하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서 자신의 응시와 타인의 응시의 경계, 그리고 자신의 응시를 거울 속 환영 위에서 따라잡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상 사이의 경계를 확인하려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회화를 이루는 미술사적/구조적 틀과 이미지 자체 사이의 경계를 탐험하는 접근은 자신의 존재론적 인식과 시각예술의 전형성에 대한 ‘화가’로서의 인식이자 현대미술을 생산하는 ‘생산자’로서의 의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번 전시에서 송은영은 거울이라는 매체가 단순한 회화의 ‘쉬포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전시공간을 응용한 설치회화를 시도한다. 그녀는 또 다른 경계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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