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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브먼트 Movement

이번 전시는 1996년 12월 31일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전후의 개인적 경험과 에릭 홉스봄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노동운동에 대한 근대와 탈 근대적 입장의 글을 읽는데서 시작되었다. 1996년 노동법 통과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문제를 법으로 보장하였고 경영유연성과 세계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 후 IMF체제의 신자유주의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각을 높이 세웠다.
지금 우리에게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아파트단지의 조경처럼 복원된 청계천 다리위에 어설프게 잘려진 전태일의 동상,60-70연대 산업역군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던 여성 노동자, 80년대 걸개그림 속의 굳건하고 결연한 노동자의 모습, 일용직 노동자와 예술가의 죽음, 임노동자, 비정규직의 파업, 비리의 온상인 어용노동조합....

정보화와 참삶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는 지금, 우리의 일터에서 지하철을 타면서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기면서 여전히 노동을 하고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에게 노동은 무겁고 존재론적이지만 일상적이고 지루한 이중적 모습으로 지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대중은 압축적 근대화 속에서 빠져나온 익명이며 민중은 민주화투쟁에서 호명된 주체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상호의존성을 강화시켰던 포드주의의 ‘무거운 근대성’과 자본과 소비의 관계를 비물질적 영역까지 확장하고 재생산하는 포스트포드주의의 ‘가벼운 근대성’은 자기증식과 변종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다중’ 이라는 새로운 주체의 범주를 선택했다. 다중은 다수로서의 다수의 사회적, 정치적 실존형태이다. 다중은 정치적 단일성을 기피하고 공적 현존이 박탈된 사적이고 단독적이다. 다중은 개인과 집단사이의 중간지대에 있다. 이번전시는 지구제국에서 다중의 ‘정동적’ 노동의 잠재성을 찾아내는 의미를 갖는다.
전시 제목 무브먼트는 틱장애에서 착안 했다. 틱장애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근육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무브먼트는 다중의 노동의 프로세스가 지닌 내재적 움직임에 주목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삶과 예술의 영역에서 관습적으로 내재적으로 수행하는 움직임의 맥락을 드러내고 한계와 실천의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몇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이러한 한계와 가능성을 이야기 했지만,여전히 추상적인 통계를 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체적인 실천의 지점에서 노동의 삶 능력에 대한 가능성을 찾고자 했고 그것이 무브먼트다.
김월식의 (독서는 마음의 양식)은 동네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폐품수집의 수레와 종이박스 위에 종이 박스로 만든 70년대 국민계몽의 아이콘인 독서하는 소녀상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최 극빈층의 노동인 폐품수집 행위와 화이트칼라로의 계급상승 수단으로 훈육된 독서에 대한 아이콘을 통해 산업사회에서 육체노동을 비하하고 정신노동을 우월시 했던 왜곡된 노동을 아이러니컬하게 제시한다. 이는 시장실패와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공공기금을 받고예술을생산하는미술의관습시스템에대성찰도포함한다.

채은영 / 큐레이터




작가 statement

여기 사소한 노동이 하나 있다고 치자. 누워서 떡을 먹는 것 같은. 노동으로 환산하기엔 다소 억울한 그런 노동 말이다. 실정 누워서 떡을 먹는다는 사실은 그리 만만하지 만은 않지만 주체적인 결정에 의해 스스로 행한 이러한 행위를 가지고 우리는 노동이라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누워서 떡을 먹던 떡을 썰던 간에 그것이 어떤 교환 가치
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 또 타의에 의한 강요가 아닌 한 우리는 그것을 절대 노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누워서 떡을 먹는 것 같은 노동이 있다고 치자. 이를테면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위해 수혜 받은 지원금으로 한 노동의 메커니즘을 통째로 사버리는 몰염치한 행위 같은 것 말이다. 절대 자본의 힘으로 누워서 떡 먹 듯 거두어 버린 한 노동의 시스템은 그것이 작가의 작업이라는 또 다른 노동과 만나는 지점에서 사라져 버린다. 주체도 사라지고 과정도 사라지고 달랑 부피만 남아버린 노동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죽은 아들 불알 만지듯 허망한 일이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체 겨우 형태만 갖고 있는 바이브레터 vibrator처럼 자위의 밀도를 높여주는 부피와 존재감엔 언제나 진짜 사랑이 그리운 것이다. 노동에는 관성이 있고 패턴이 있다. 시스템에 순응하려는 패턴과 그 안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관성 말이다. 그런데 미술의 시스템에서의 노동은 그 관성이 무력하다. 의심과 반성의 보호아래 재단해 버린 노동의 관성과 패턴은 이제 작업이라는 노동의 우월감을 떠받드는 좌대정도로 전락해 버렸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은 형태만 갖고 있고 온기가 없는 미술의 기념비이다. 시절을 풍미하고 시골 학교 운동장의 한 구석에서 그 노년을 보내고 있는 철지난 희망의 시뮬레이션이다. 달콤한 시스템에 기댈 수 없는 나의 작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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