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리얼리티, 완벽한 평면성을 위한 프로젝트(∴완벽한 회화)
이 작품은 1993년의 개인전, 1996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Museum City Tenjin이라는 전시 그리고 1999년 서울시립미술관(경희궁터)에서 열린 ‘사진은 우리를 바라본다’라는 전시에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93년의 개인전에서는 전시장을 두개의 방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거울방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방입니다. 카메라방은 지름 60Cm의 수제(手製) 렌즈를 이용하여 전시장 반쪽을 거대한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든 것으로서 관객은 카메라의 내부에 들어와 렌즈에 의해 벽면에 투사된 영상을 보게 됩니다. 사방을 아크릴 거울로 둘러싼 거울방 역시 관객이 내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이 두개의 방은 모두 실재와 영상,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비춰진 것의 관계를 대조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카메라방에 있어서의 실재는 전시장 밖의 거리풍경이며 관객이 카메라방의 내부에 들어감으로써 이미 비춰지고 있던 영상을 보게 되며, 거울방의 경우에는 관객이 거울방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영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방의 경우에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주체가 분리되어 있는 반면, 거울방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동일합니다.
두 경우 모두 시지각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렌즈와 거울에 의한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또한 두 방의 영상이 모두 문자 그대로 평면 위에 펼쳐진 질량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완벽한 평면성을 보여줍니다. ‘리얼리티’와 ‘평면성’, 그것은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의 우리 미술을 양분한 모토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것들에 대한 때늦은 농담일 수도 있겠지요.
그 외에도, 테크놀로지가 근대미술의 변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관점에서, 회화에 있어 그 최초의 막강한 경쟁자였던 카메라를 체험케 함으로써 테크놀러지와 미술의 관계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영점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제 의도였습니다.
완벽한 리얼리티, 완벽한 평면성을 위한 프로젝트(∴완벽한 회화)
이 설치작업은 분리된 두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거울방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방이 그것이다.
카메라방은 지름 60Cm의 수제 렌즈를 이용하여 전시장의 반쪽을 거대한 카메라 옵스큐라로 만든 것으로서 관객은 카메라의 내부에 들어와 렌즈에 의해 벽면에 투사된 영상을 보게 된다. 거울방은 사방을 아크릴 거울로 둘러싼 방으로서 역시 관객이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두개의 방은 모두 실재와 영상,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비춰진 것의 관계를 대조적으로 다루고 있다. 카메라방에 있어서의 실재는 전시장 밖의 거리풍경이며 관객이 카메라방의 내부에 들어감으로써 이미 비춰지고 있던 영상을 보게 되며, 거울방의 경우에는 관객이 거울방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영상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방의 경우에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주체가 분리된 반면, 거울방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동일시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지각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렌즈와 거울에 의한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미술을 수용한 한국미술에게 서구미술의 ‘보는 방법’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때늦은 질문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외에도, 20세기 미술의 변모에 끼친 테크놀러지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그 최초의 막강한 회화의 경쟁자였던 카메라를 체험케 함으로써 테크놀러지와 미술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까지 확대되기를 바랐다.
한편으로 두 방의 영상이 모두 문자 그대로의 평면 위에 펼쳐진 질량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이 편집적으로 추구하던 평면성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비록 이 작품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때늦은 문제제기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원근법, 리얼리티, 평면성에 대한 농담(joke)일지도 모르지만 미술에 관한 한 서구에 대해 계속 무역역조의 상태에 놓여있는 우리의 미술에게 이 작품이 진정한 리얼리티는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영점’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의의는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