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ve

검색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기


작년 봄에 정재철로부터 처음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 속에서 충분히 예술적, 문화적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수년 전부터 그가 실크로드 지역을 자주 여행하면서 변화를 맞게 된 작품의 여정이 이러한 예술적 아이디어에 대해 더욱 신뢰를 갖게 했다. 그 후 작가는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작품을 미술관 등에서 여러 회 발표하였다. 그리고는 프로젝트의 실행으로서 국내에서 초반 작업을 거친 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을 다녀왔다. 마침내 지난여름에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위해 이 나라들을 다시 한번 방문하였는데, 나는 그 중 몇 나라를 작가와 동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한때 동서의 물품의 교역만이 아니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을 통해 학문, 종교, 기술, 언어 등의 교류가 행해졌던 길, 즉 총체적 문물을 나누던 그 길이 세월을 뛰어넘어 이제 하나의 창조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내렸다.
네트워크를 통한 전지구화 속에서 클릭 하나로 세계를 한 순간에 돌아보는 오늘날, 과거 그 길 위에서 작가 스스로 발품을 팔아 한 곳 한 곳 방문한 ‘사이트’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날 한국의 산업사회에서 소비를 촉진하는 광고 현수막을 한때 상업적 요지였던 실크로드라는 타 문화권에 옮겨놓음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의 점이와 중첩이 일어날 것이라는 서울에서의 관념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볼 것이었다.

현수막은 여러 형태로 거듭나 있었다. 탁실라(Taxila)의 돌 공장에서는 햇빛 가리개로, 오토 릭샤(차량의 일종)의 장식 덮개와 침대 시트로, 파수(Passu)의 집 안에서는 장식장 내지는 선반의 받침보로, 캬슈가르(Kashgar)의 집에서는 대문과 같이 입구를 가리는 커튼으로, 쿠처(Kuche)에서는 과일 가게의 천막으로 등과 같이 변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만들어낸 오브제들의 형태와 그 이미지(그 곳 사람들은 당연히 현수막의 문자를 글이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였다)는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실내와 그들의 의상과 그곳의 화려한 대중차량과도 제법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곳에서 현수막은 더 이상 고정된 광고물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쓰임새 있는 시각적 오브제로 변형되는 과정을 함유한 비결정적인 무엇이었다.

작가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다. 작가는 단지 몇 달 전에 깨끗하게 세탁하고 포장한 폐 현수막을 ‘예술 프로젝트’라는 설명과 함께 던져놓고 사라졌다. 그것은 작품이 될 수도 있고 작품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가와 대화를 나눈 대중이 그것을 새로운 오브제로 구체적 현실 속에서 뚜렷하게 존재케 한 것이다. 이것은 현수막이 환경과의 관계에 의해 존재하며 대중의 반응을 기다리는 잠정적인 예술적 실체였음을 알려준다.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현대미술 작품은 관람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박물관식의 소통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술관을 방문한 ‘미술계의 대중’은 여전히 작품에 대한 접근 금지라는 암묵적 합의 하에 ‘눈으로 바라보기’라는 시각적 사고 속에서 작품과 만나고 있다. 그러나 정재철은 관념과 의식 속에 갇힌 눈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예술을 체험하라고 한다. 이로써 그의 예술은 미술품이 특정한 한 지점에 오롯이 놓임으로써 예술적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것이 된다. 일상생활과 통합된 예술로서 실재 세계의 내부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프로젝트는 예술이 엘리트주의의 사적인 영역에서 보편적인 공공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역설하면서, 마침내 사회적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작가가 실크로드의 대중에게 전달한 현수막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은 대중이 자신의 감각과 필요에 따라 선택하는 것에 달려있다. 사실 예술과 만난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대중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현수막을 색다른 감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실크로드 지역의 현지인들과의 만남이 이 사실을 증거 해주었다. 어떤 이는 예술 행위에 참여한다는 만족감으로 자발적으로 각 사이트를 방문하는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또 어떤 이들은 작가에게 자신들이 만든 것에 대한 의도와 과정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특히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예술적, 사회적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우리 일행에게 질문하고 토론을 주도한 파키스탄의 중년의 남성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 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현지인들과의 만남은 예술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의 동기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프로젝트가 인간의 보편적 관념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상업적 번영을 누리던 실크로드 시절과 달리 전반적으로 경제적으로 낙후된 환경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참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특정 집단만이 미술을 향유하는 모더니즘 미술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의식하는 미술을 지향할 것을 촉구한 마이어 샤피로의 생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고도로 개체화된 예술가가 나름의 분명한 메시지를 관람자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정재철의 프로젝트는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현존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것은 관람자가 시각적 오브제를 감상하는 관조의 영역에서 촉각적이고 신체적 활동을 수반하는 행위의 영역으로 옮아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예술의 물리적이면서도 개념적인 영역의 경험이다. 작가가 경험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맥락을 제공하고 예술의 ‘전개’는 대중이 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작가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실크로드 지역의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정신과 감정을 자극하고 행위를 촉발시켰으며, 마침내 새로운 정서를 경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 행위가 일상적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논쟁적이다. 기존의 예술 개념에서 보면 형식도 없고 예술가가 특별히 말하는 것도 없는 이것은 대중의 개입으로 인한 형식적인 모호성과 불확실성 때문인데, 바로 이 덕분에 다른 문화 사이에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방식이 이 프로젝트의 내용이다. 한국의 미술관 안의 관람자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담은 기록과 사진을 보면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행위에 대해 나름대로 반응을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사용되는 현수막과 실크로드에서 무엇인가로 만들어진 현수막 사이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지리적 거리를 좁히거나 소멸시킨 현수막은 우리의 정신과 감성을 예민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작가는 창작 과정의 일환으로 소통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성하며 의미와 문화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고무적이고 비판적이며 혁신적 태도로서 사회적 문화적 교류를 만들어내는 오늘의 미술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미학적 카테고리의 보다 넓은 폭을 탐구하고 시험한다.

무엇보다도 실크로드의 현지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잊을 수 없다. 나그네와 다를 바 없는 우리 일행에게 따뜻한 차와 빵을 대접해준 그들의 친절한 마음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작가를 다시 만난 반가움에 수줍으면서도 밝게 웃던 카슈가르의 소녀도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가 잘 해낼 수 없는 일을 예술은 해내는지도 모른다.

박숙영 / 평론가, 이화여대 조형예술학과 교수




여러분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세요? 작가정보 페이지 이동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댓글(0)

현재 0byte/ 최대 500 byte

등록

Quick Pag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