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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들의 무대, 표면의 시지각
- 송명진의 그림에서 본 것

온갖 미장센으로 화려하게 움직이는 영상의 시대에도 ‘그림의 쾌락’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이때의 쾌락은 물론 성격은 다를지라도 그리는 사람도,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는 사람도 공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쾌락 중 한 가지는 화가가 자신 이외에는 볼 수 없는 어떤 세계를 평면 위에 가시화함으로써 나, 너, 우리가 ‘함께’ 볼 수 있도록 할 때 온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깨어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공유한다. 반면 잠든 자들은 각자가 자신의 세계를 하나씩 갖고 있다. 전자가 사실의 세계여서 그것을 보고 아는 누구나 가시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후자는 꿈의 세계로서 꿈꾸는 주체 혼자만 보고 아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가가 만약 이러한 자신만의 꿈(혹은 환타지, 또는 개념)세계를 성공적으로 그려낼 경우, 그 세계를 볼 수 없고 몰랐던 우리는 그림을 통해 그를 공유하는 쾌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미 극복된 듯 보이는 회화와 사진의 차별성 논쟁을 재연할 의도는 없지만, 또한 영상이미지는 이미 현실 재현의 임무 너머 시뮬라시옹의 과제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화가 우리 가시성의 세계에 닦아내고 있는 여러 샛길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다. 그 샛길은 캔버스나 종이 위 평면에서 우리 시지각으로 난 길이며, 그 길 위에서는 움직임 없이 운동이 발생하고, 시간성과 상관없는 사건이 끊임없이 전개된다. 여기까지는 당연히 성공적인 그림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며, 앞으로 이 글에서 논할 송명진의 회화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1. 표면의 방법론 : 평면의 한계에서 내러티브의 재구성까지
회화란 움직임도 없고 소리도 없는 오직 평면의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거기서 얻는 쾌락이 얼마나 다채로울까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더러 이러한 회의 자체를 회의하게끔 하는 그림들과 조우한다. 세잔의 회화가 그렇고,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그렇다. 송명진의 그림들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정말 회화만이 줄 수 있는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탁자와 그 위의 사과가 곧 굴러 떨어질 듯 그려진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을 보면 평면의 공간화에 감탄하고, 추상화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리히터의 <무제>를 보면서는 추상과 구상의 역설적 동질성에 시각뿐만 아니라 지적 쾌락까지 느낀다. 베이컨의 초상화 연구 시리즈 회화에서 지각하는 평면의 운동성은 더 말 보탤 것도 없고. 이제 바야흐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송명진이라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논하면서 서구 현대회화의 대가들을 앞세운 것은 이 작가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도, 그렇다고 그녀의 그림을 앞서 거장들의 반열에 줄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사실은 송명진이 이들의 적자(嫡子)는 아닐지라도 그녀의 그림들은 이들의 회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회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대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진리라면, 작가 송명진 또한 예외는 아닌 것이다. 그 모티브와 양태는 각기 다르지만 미리 예시하자면, 세잔이 추구했던 3차원 공간의 평면적 구현은 송명진 회화에서는 대상 묘사에 있어 극단적 평면성의 강조로 시도된다. 리히터가 문제시했던 추상화의 정체성은 송명진의 경우 구체적 형상그림을 일견 색면회화(color field painting)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다시 한번 비틀리며, 베이컨의 운동성은 그녀의 그림에서는 움직이는 순간의 연속적 묘사가 아니라 감상자에게 움직임을 예측케 하는 결빙된 장면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다뤄진다. 여기서 감상자가 움직임을 예측한다는 뜻은 말을 바꾸면 송명진의 그림 자체에는 움직임이 없으나 그려진 장면들에서 그 전후의 움직임을 상상해 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작가가 평면 위에 움직임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움직임의 흔적 혹은 움직임이 고정된 상태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관람자는 이 흔적 혹은 상태에 상상적으로 개입한다. 그리고 그림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한다. 나는 송명진의 첫 개인전 《순간 멈춤 - image capture》에서 이를 “관람자의 몫”이라 했는데, 이 관람자의 과제는 이번 전시에서도 필수적이다. 나는 한 명의 관람자로서 여러분보다 먼저 작가의 작품을 보고, 상상적 개입을 했었는데, 다음에서는 내가 본 것을 다시 말로 옮겨 보려 한다.

2. 표면의 내용 : 평면은 사건들이 구현되는 무대이다
단 하나의 색이 캔버스 표면을 거의 뒤덮고 있다. 불투명 녹색(opaque oxide of chromium)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그저 불투명한 녹색의 표면이 아니라 형체를 가졌다. 무질서하게 포개져 있는 녹색 허깨비 무리처럼도 보이고, 녹조식물의 일종인 청각 무더기처럼도 보이는 이 형체들은 이제 거의 흰 캔버스를 잠식할 기세로 응고돼 있다. 또 다른 그림은 이제 아예 그 불투명 녹색이 균질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오른쪽 밑 부분에만 마치 이제 막 녹색 캔버스 표면을 찢고 나온듯한 사람 형상 셋이 그려져 있다. 사람 형상이라고 했지만, 외곽선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얼굴도, 몸짓도 없다. 150호 크기 두 쪽의 다른 그림에는 거대한 녹색 격자 판이 그려져 있는데, 한쪽은 그 각각의 격자가 바닥을 드러내며 녹아 증발하는 중이고, 반대쪽은 톱으로 거칠게 잘린 듯한 직각의 딱딱한 격자가 바닥에 펼쳐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송명진이 이번에 선보이는 모든 그림들에는 녹색이 많게는 화면 전체를 적게는 절반을 차지하고, 거기서는 제각기 어떤 형상들이 도드라져 있거나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묘사돼 있다.
송명진의 그림은 그래서 모더니즘 색면회화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그것을 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즘 회화의 문법에서 말레비치 그리고 바넷 뉴먼이나 마크 로드코는 오직 색과 면의 관계를 화면에 현상학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회화의 평면성을 정의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보고 아는 가시적 세계를 그림의 환영(illusion)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색과 면이라는 회화의 물질성 자체를 극단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송명진은 그림의 내용을 ‘opaque oxide of chromium’이라는 색으로 제시하면서 형상들을 사실적으로 모사하지 않음으로써 그림이 그려진 곳이 평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이 모더니즘 회화의 反 환영성과 자기 정체성을 송명진이 자기 그림의 성격으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색 면을 특정한 형상으로 채우거나 사건의 무대로 변주함으로써 기존 모더니즘 회화와는 다른 샛길을 내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문법의 근엄한 캐논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언어로 묘사해 봤듯이 그녀의 그림에는 우리가 딱히 뭐라 규정지을 수 없는 사물의 형상과 사건이 불투명 녹색으로 응결된 채 제시되어 있다. 그 형상과 사건은 무시간성의 평면 공간에 맞게 조율된 듯 명암 처리되어 있음에도 평면적으로 보이고 부동성을 띤다. 3차원의 평면화(化)와 부동의 운동성은 세잔이 탐구했고 그의 회화가 도달했던 시각세계이다. 물론 송명진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완벽하게 성취돼 보이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사물을 평면적으로 처리하는 그녀의 방식은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에 더 가까운 듯 하고, 부동성은 운동 직전이나 직후의 긴장보다는 응결된 상태, 그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송명진 그림의 성격은 역대 회화와 비교하여 결손 된 부분이 아니라 그녀 그림의 특수성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듯 하다.

3. 표면의 시지각 : 눈으로 좇기에서 구상하기(imagination)로, 정지에서 움직임으로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그림 내용의 측면에서, 송명진 그림의 특수성 또한 이 일러스트레이션 기법과 응결된 상태의 묘사를 통해 구체화된다. 앞에서 몇 몇 그림을 내가 본 식으로 서술했었는데, 사실 작가가 붙인 그림 제목들은 그 그림의 형상이나 사건을 다른 것으로 지시하고 있다. 녹색 인간이 포개져 있거나 청각이 증식한 것으로 보았던 것은 작가에 따르면 나무이며(<자라는 무덤(growing tomb)>), 사람 형상이 녹색 캔버스를 찢고 나오는 것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은 잔디밭 속의 사람들()이라는 식이다. 감상자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림에서 다른 무엇을 볼 자유가 있지만, 나무나 잔디밭의 사람들 같은 단순한 형상을 위와 같이 다르게 본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를 나는 일상의 평범한 시각세계를 작가가 우리와는 다르게 보고 형상화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마치 꿈이나 환상의 세계에서는 사물이나 인간의 형상이 기이하게 변하고, 사건이 설명 불가능하게 전개되듯이, 송명진은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고 그 본 것을 자신의 화폭 속에서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가만이 볼 수 있었던 세계는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가시성의 공유세계로 옮겨 온다. 예컨대 그 세계에서는 거대한 산이 무수히 작은 구릉을 품고 있는 풍경 위를, 날아가는 모습이 결빙된 듯 보이는 새가 가로지른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쉽게 볼 수 있는 산을 깎아낸 무덤이 이렇게 보인다니 다소 놀랍다. <풍경의 장>은 작가의 집 앞 하천지대를 그린 것인데, 이러한 설명이 없다면 우리가 그 그림에서 보는 것은 동화에나 등장할 법한 온갖 양식화된 식물과 그 평면적인 녹색 식물류의 바리에이션일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사물 혹은 풍경을 동일한 색채만을 변주하며 평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다른 한편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은 인과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대의 한 장면처럼 제시됨으로써 감상자인 우리의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즉 송명진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눈으로 좇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모티브로 해서 ‘구상하기(imagination)’를 실행하게 된다. 예를 들면 라는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교각의 두꺼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녹색 잔디에 파묻힌 네 사람(과연 그것이 인간이라면)이 무슨 음모를 모의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추리하게 된다. 사건만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도 추리한다. <휙->은 앞의 그림처럼 교각이 늘어선 잔디 위를 무엇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궤적을 그린 그림인데, 그 움직임의 주체가 누군지, 왜 어떻게 이런 흔적이 만들어졌는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송명진의 그림이 일관되게 이 ‘관람자의 (상상적) 개입’을 요청하니 말이다. 그 요청은 말을 바꾸면 그림의 표면과 대면한 우리 스스로 사고와 시지각을 활발하게 움직이라는 작가의 바램일 수도 있다. 전통적인 회화감상법인 관조 너머. 꿈이 짧은 것처럼 우리가 사물과 사건에서 받는 인상 또한 짧다. 또한 꿈이 우리의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물과 사건에서 받는 인상 또한 자기의 상상(구상)력을 토대로 한다. 회화는 그러한 꿈이나 인상의 짧음 혹은 개인성을 그림으로 연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그림은 단지 평면 위에 그러한 인상을 붙들어 두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그(보는 이 또는 인상 자체)를 움직인다. 송명진의 그림들 또한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러한 특성이 무슨 회화의 쾌락이며, 설령 그것이 쾌락이라 하여도 지나치게 지적인데 미술이론을 섭렵한 일부 감상자 말고 어떻게 우리 ‘함께’ 공유할 수 있겠냐고 나를 비난할 듯 하다. 타당한 비난이지만, 이러한 비난은 송명진의 그림을 언어로 해석하고 있는 이 글의 난점을 지적하는 데만 유효하다. 그러니까 송명진이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거기서 잠든 자처럼 그녀만 보았던 사적 시각세계가 어떻게 우리 함께 볼 수 있는 가시성의 공유공간으로 현상됐는지 보고 그 즐거움을 만끽해야 한다. 누가 아는가? 만약 그러한 감상이 성공적일 경우, 이 지나치게 현학적인 비평도 이해받을 수 있을지.

강수미 /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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