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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보기의 힘

박주욱이 그려낸 풍경은 낯설다. 눈만 뜨면 마주하게 되는 자연의 색감을 반전시켜, 본 대로 믿는 습관의 체계를 깨뜨려 놓는다. 우리는 그가 설정해 놓은 익숙하지 않은 필터를 통해 낯익은 풍경들을 마치 처음 마주 대하는 듯 관찰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박주욱의 회화가 지나치게 왜곡된 조형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형태의 묘사나 화면의 구도는 꽤 정확한 규칙을 지키고 있다. 그가 구사하는 조형언어에서 유일하게 다른 한 가지는 바로 화면의 색감, 즉 필름의 네가티브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밝은 빛이 검게 나타나고, 어두움이 오히려 빛을 발산해 낸다. 박주욱이 발탁해낸 빛과 어둠, 이러한 ‘뒤집어보기’의 방식은 낯선 힘을 가진 특별한 풍경을 낳는다. 반전된 명암에 의해 뒤바뀐 세상의 낮과 밤, 그리고 밝음과 어둠, 거기에 마젠타류의 주된 색조들은 심지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몽환이라고 해서 환상적이고 말랑말랑한 감상주의적인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우울하고 침잠된 감성의 코드로 읽혀진다. Antistar : 굳이 해석을 하자면 ‘빛반대론자’ 정도가 될 것이다. 박주욱의 ‘스타’는 유명연예인을 지칭하는 그것이 아닌 대상을 즉물적으로 대하게 만드는 장치의 ‘빛’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빛이 제공하는 속성에 학습되어진 우리는 그 메카니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사물을 인지하며 사고하게 된다. 따라서 빛의 반전은 대상의 반전이며, 껍데기의 즉물 대신 실존을 드러내 놓게 만드는 새로운 스팩트럼이 되어준다.

박주욱 회화의 주된 소재가 되는 나무는 일반적인 포지티브 상황에선 지극히 편안해 보이는 대상으로 심지어 안일하게까지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네가티브로 만드는 순간 전혀 다른 국면을 맞는다. 들뜨고 흥분하게 되며 불편해진다. 네가티브 방식을 통해 역설된 아름다움을 보면서 작가는 새로운 자극에 대한 매력과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양새와 유사한 면을 발견한다. 특별한 사고 없이 편안해 보이는 현실과 그와 반대로 불편한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말이다. 또한, 숨은 그림 찾기처럼 포진해 있는 인물들의 등장은 그의 안티스러운 심리상황을 더 없이 잘 살명해 주고 있는데 <나무 아래서>의 화면 하단에 등장하는 남녀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박주욱이 절대로 끼어 들 수 없는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이며, 작가에겐 낯설고 이질적인, 접근하기 힘든 배타적 공간이 된다. 대상에게서 받는 혹은 주는 배타적인 느낌, 이것이 타자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임을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포지티브에 안주하기 힘든 네가티브식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다.

박주욱의 네가티브식 사고이자 안티식 사고는 비단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대한 관점으로도 드러난다. 아름다워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의 테두리를 에너지가 팽배한 기운으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장치일수도 있지만 핵폭탄이 터진 후 나타나는 버섯구름의 형상이기도 하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혹은 이미지를 포착한 순간에 착안된 것으로 나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더불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연속되어지는 자연 생명력이 주는 신비로움과 인간의 한계, 즉 세기말 상황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기말적인 장치는 과 에서도 보여 진다. 은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인물이 주제처럼 보인다. 여유롭게 보여야 마땅한 이 그림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풍성한 자연의 모습과 상충된 후경의 세기말적인 탑과 도시 풍경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묘사해놓았기 때문이다. 발전과 문명의 상징처럼 보이는 이 탑은 결국엔 자연을 고갈시킬 세기말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자전거를 타는 인물의 모습 또한 여유롭다기 보다 일상의 탈출과 도피를 꿈꾸는 모습이 되어 버린다. 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자매체(핸드폰)를 통해 타자와의 접속을 원하는 고립된 현대인의 모습과 일부러 녹슬게 표현한 다리 난간 구조물로 하여금 언젠가 허물어질 인공의 산물에 대한 암울한 미래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박주욱이 근본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세기말 현상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본질에 대한 진정성과 실존하는 자아에 대한 본질에 주목한다. 는 빛의 반전 뿐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또 다른 부분인 크기의 문제까지 역전시켜 놓고 있다. 즉물인 컵보다 그것의 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림자가 화면에서 더욱 크게 자리 잡는다. 빛에 의해 드러나는 현상을 뒤집어 보며 동시에 빛으로 인지하는 현상 속에 감추어진 것들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게다가 컵 내용물의 흔적처럼 보이는 말라있는 부산물에 집중하고, 이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염세적인 자아의 한 단면으로 흔적과 같이 미비한 대상을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물의 본질. 박주욱은 포지티브라는 일반적인 명제 아래 외면되어 왔거나 감추어져 있던 진정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그림은 그의 작업이 변화의 시점에 도래했다고 짐작되는 이다. 물론, 기존 박주욱 회화의 네거티브와 몽환적인 느낌,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일상탈출 욕망이 기존의 것과 별반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 구체적으로 화면을 살펴보자면 박주욱식 대상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는 치열한 묘사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강물인지 풀밭인지 알 수없는 나무 밑 경관은 몽환과 환상을 극대화시키며 제3의 공간을 열어 놓는다. 빛에 대한 안티로 시작한 그의 그림이 네거티브 방식을 차용하여 이루어졌다면 어쩌면 이 이란 작품은 그 네거티브마저도 원론의 빛으로 돌리기 위해 대상 자체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게다가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적인 측면 역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발설하고 있다. 상승하는 나무와 여전히 삐걱거리는 희박한 존재감의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 그들 아래에 숨겨 놓은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는 흰색 유선형 표식은 아래로 뛰어 내리기 직전의 사전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탈에 대한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이미지를 읽는 과정에서 쉽게 목격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숨겨놓은 표식이 들어났을 땐 작가의 심리를 반영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읽혀진다.

박주욱은 왜 이렇게 일상의 탈출과 인생의 공허, 실존과 허상에 본질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그림으로 그려내는가.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술 활동은 감정표출의 일종이다. 작가는 감정을 고양하고 방출함으로써 자기의 심적 상태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예술 활동을 기초 지으려 한다고 히른(Hirn)은 말하고 있다. 박주욱이 관찰의 대상으로부터 인지된 내용을 감정적으로 파악할 때는 그것과 유사한 자신의 감정을 자기 내부로부터 대상에 투사하여 마치 대상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즉,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인 것이다. 그러한 박주욱의 포장은 네가티브식 반전이라는 재현의 대립개념일 뿐 아니라 대상에서 오는 인상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상이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작가의 마음속에 생기는 효과이고, 표출은 이와 반대로 마음속의 체험 내지 감정을 밖으로 발산하는 작용이다. 박주욱은 바로 대상의 인상에 대한 감정이입 표출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며, 그것을 통해 본질과 진정성에 대한 고민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박주욱의 회화는 실재적 재료인 대상과 비실재적 재료인 정신이라는 두 개의 구성요소로 성립되어진다. 즉, 실재적-비실재적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중적 성격인 현실의 비실재화를 통해 그가 뒤집어보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공원의 나무와 일상의 보편적인 사물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뒤집어진 세상에서, 뒤집어진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실존적인 자아를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한번씩 꿈꾸는 일탈, 그리고 실존하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박주욱은 철저한 자기와의 싸움으로 보여주고 있다. 섬세한 필치로 커다란 화면을 메우는 그의 행위 자체는 노동이다. 동시에 동언반복의 양상을 띠고 있는 잎사귀, 혹은 공기의 흐름들은 무의식의 행위라기보다는 사고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수련의 과정으로도 읽혀진다. 이러한 과정 중에 발휘 되는 예술적 영감이라는 부분은 강한 견인력을 가지고 그를 열중의 상태로 끌어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화면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단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해 내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열중의 적절한 수단으로 박주욱이 선택한 방법은 네가티브이고, 이는 표현목적을 유효하게 달성하는 도구가 된다. 이 도구는 합리적, 목적적인 동시에 의식적 숙련을 요하는 특수능력이기도 하다. 이렇게 마련된 방식 안에서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반전이란 현실의 불편이나 우울을 타파해 판타지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뒤집어 봐도 여전히 우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전이라는 코드로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전의 반전. 일종의 속임수일지도 모르는 이 시나리오는 박주욱의 회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성에 관한 물음 즉 본질에 대한 고찰을 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더 이상 박주욱의 작업을 네가티브식 기능에만 맞추어 바라보지 말자. 그가 보여주고 있는 사진의 반전된 이미지가 주는 아이러니한 현상은 그의 속내를 담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이제 그 속에 담긴 풍부해진 숨은 이야기들 속에서 포지티브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본질, 어쩌면 안티가 진실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김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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