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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변형한 뒤, 그것을 다시 캔버스 화면 위에 그리는 박주욱의 작업…… 왜 작가는 바로 외부의 이미지를 그리지 않고 한번 뒤집어서 그리는 것일까? 혹시 그린다는, 재현 한다는 것에 대한 반문인가? 그렇다면 그의 작업은 재현적인 사유 자체의 근본적인 비판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사실적인 그림은 언제나 재현을 통해 닮음으로 돌아가지만, 그- 역도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작업은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포지티브나 네거티브는 현실 혹은 외부의 상황에 대한 심리적인 반응으로써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면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이를 뒤집어 보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그의 네거티브 그림은 이제까지의 통념적이고 문학적인 그리기의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문학적인 그림을 전면 비판하지 않고 문학과 공유 할 수 있는 세계를 남겨 둔다. 그것이 그만의 작업 특징인 사진매체를 이용한 작업인 것이다. 사진과 대립함으로 회화적인 특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회화인 것이다.

그럼 오늘날의 상황에 그의 작업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넓게 보자면 과연 ‘예술’이 세계에 존재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아직도 회화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고 사고와 감성의 풍부함을 제공하는 기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미술사 속의 ‘예술’들은 최근에 명명된 것인지 모른다. 그것과는 달리, 선사 이후 시각 생산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것들은 두려움 속에, 샤머니즘 속에, 종교 속에 아니면 심리적인 전이현상 속에 존재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앞에 있는 것들은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술이라는 표피에 이상한 것들이 들러붙어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예술밖에 있는 일반적인 사회 속에서는 더욱더 잊혀졌던 예술의 증후들이 가득 차 보이기 까지 한다. 이 이미지들은 광고 속에서 많이 발견되기도 하며 컴퓨터 게임들은 사람들을 중독시키다시피 한다. 또한 네러티브의 흡착력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더욱 다채롭고 인터넷에서의 개인 이미지 생산물들은 매우 더욱더 자유롭게 펼쳐진다. 필자에게는 오늘날의 미술, 예술이라는 자리가 매우 혼란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의 그의 작업을 현대미술 안의 패러다임만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를 ‘신화 속의 화가’이기보다는 ‘이 시대를 사는 한 개인’으로 본다면 그의 작업은 살펴 볼 만한 이야기가 들어 있어 보인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도 쓴 타이틀은 안티스타(Antistar)이다. 이것은 ‘신화로 만들어져 가는 작가’, 혹은 ‘유명세를 타는 메인 작가’라는 것에 대한 반론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의 한 노래제목이다. 영국의 Trip Hop밴드 ‘Massive Attack’의 노래로 ‘내 상처를 아물게 해줄 수 있는가, 제발 무감각하게 해줄 수 있는가……’라는 노래말로 시작된다. 음악을 들으며 한참 동안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작업과 이 노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작업읽기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간다.

네거티브로 그려진 그의 화면에서 대상들은 명확히 구분되어 보이지 않는다. 이 화면의 풍경은 밤인가, 낯인가, 저것은 나무인가 폭탄의 불길인가, 혹은 저 인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반문을 통해 본 그의 작업은 세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그것을 피해 어디로 숨어버리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 온다. 이것이 그의 네거티브의 숨은 비밀일 것이다. 그의 작업 속에 이글거리는 태양은 하나의 구멍으로 보이기도 하며, 화면 구석구석에는 그만 아는 하나의 수수께끼들이 숨어 있어 보인다. 그러한 비현실적인 모습은 필자로 하여금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동물되기, 하루키의 우물, 뫼루소의 태양 등등 현실 속에 숨겨진 비현실적인 모습들을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작업을 보면 마치 필자가 영화 ‘프로데터’, ‘로보캅’의 우주인이나 로봇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듯 하다. 아니 작가 스스로가 괴물의 시각으로 이세상을 보고 있다. 그의 초점은 피사체에 맞추어 있다. 그는 대상들을 앵글 안의 그저 하나의 피사체로만 볼뿐이다. 그런 피사체들은 캔버스에 작업으로 남겨진다. 그는 세상과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사이에 사진기라는 매개체를 두고 있다. 그 감수성은 두려움에 근거한다. 그에게서 두려움은 마치 ‘기피성 성격장애(Avoidant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진 환자처럼 그를 계속 세상과의 단절을 만들어 놓고 계속 자신에게로 도망치게 한다. 그가 현실에서 신체적인 접촉이 없이 만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TV 드라마나 인터넷 등의 그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손으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함께 부딪기 보다는 앵글로 담아내는 시선만이 작가가 이 세상을 경험하는 유일한 것이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세상을 피해 그만의 안식처로 도망가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창문만을 열어놓고 멀리 있는 대상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흰 캔버스에 그것들을 담아낸다. 이제 망막이 아닌 필름에 맺혀진 잔상은 캔버스를 통해 드러낸다. 하지만 그 캔버스는 하나의 벽이 되어 세상과 그를 갈라 놓는다. 그에게서 체험공간으로 있어야 할 이세상은 창문 밖 풍경, 인물뿐이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대상 그러한 세상과의 간극을 그는 그저 캔버스에 놓아두는 것이다. 그의 시각은 앵글 안에만 있고 그의 촉각은 셔터 위에만 있다. 본래 감각은 외부에 직접적 반응을 하는 신체의 표현기관이다. 촉각이던 미각이던 외부의 것과 부딪쳐 반응하는 것이 감각이다. 가장 섬세하며 강렬하게 일어나는 세포 속의 국소적인 반응이다. 여기서는 불쾌하다든지 유쾌하다든지 하는 판단이 있지 않다. 판단은 지각이라는 것에서 발생한다. 지각은 외부발생의 원인들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판단 하는 선택적인 면이 있다. 감각을 통솔하고 하나의 인식 범위를 형성하게 하는 체계적인 반응이다. 이것은 대상과의 관계가 설정 돼야만 그 안에서 유지된다.

또한 그의 그림에 심리적인 근저는 불안정성이다. 항상 변하지 않은 현실에서 어느 곳이던지 날아가거나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심리적인 밀착이 없는 현실의 반영이다. 아니 너무 과민하여서 숨어버리고 마는 그가 인지 하고 있는 세계의 드러냄이다. 그의 작업을 통해서 연상되는 것이 있다면 세계의 모습은 한 면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굴절된 형태로 보여진다고 추측 할 수 있다. ‘포지티브’라는 한가지 세계만을 상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은연중에 그것만을 수용하기를 강요 당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네거티브의 세계도 양립한다. 특히 필자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업 속 네거티브의 힘은 성스러운 숲의 이미지가 폭탄의 화염으로 보여지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을 통해 생각나는 것은 정상(正常)이라는 권력적인 가치 기준을 떠나 사람은 언제나 비정상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들은 건강한 사람이기 보다는 어느 한 부분 병에 노출되어 건강을 찾아 나서는 종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더욱이 메시아가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아픔을 통해 나를 되돌아 보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치유 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 아마 그의 ‘Antistar’ 의미는 이러한 뜻이 아닐까?


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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