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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 닿는 전시장 문 앞에는 구멍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다. 잡석으로 대충 마무리한 표면 위에 뚫린 구멍은 생김새는 배수구 또는 수채 구멍이지만, 관객 앞에 수직으로 서있기 때문에 감옥의 창살같은 느낌을 주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같은 분위기가 있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좁은 출입구와 달리, 위로부터 환한 빛이 내려오는 상대적으로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인적이 드문 전시장 자체도 그러려니와, 노충현의 작품은 고립과 유폐라는 이미지를 지닌다. 그러나 그곳은 또 다른 무한을 향해 열려있는 유폐의 장소, 곧 바깥의 공간이다. 노충현의 2005년과 2006년 작업을 모은 '자리'(전시부제)전은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하였다. 작가에 의하면 그곳은 동물원의 실내 공간으로서, 동물들이 폐장시간이 되면 돌아가는 일종의 쉼터이자 숙소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동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정보가 없는 관객에게는 물 때 색깔로 찌들어 있는 정체모를 공간으로 다가온다.
 
필자는 작품 [물 속의 사막]이 실린 전시 안내 엽서를 처음 받았을 때, 1970년대쯤에 지어진 낡은 목욕탕을 떠올렸고, 노충현의 작품을 본 후에도 낡은 지하도라든가 터널 같은 곳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은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듯한 존재인 동물의 거처이기도 하지만, 불과 얼마 전 우리의 공적, 사적인 공간과도 가까운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은 이를테면 육체적 심리적 분비물을 처리하기 용이하게 위생 도기류로 덧대어 만들어진 건축물들이다. 한편 작가는 설치의 묘를 살려 전시가 열리는 장소도 그림 안의 공간과 비슷하게 연출한다. 작품 속 보이지 않는 주인공인 동물들의 장난감인 폐 타이어 위에 그림을 얹어 놓는가하면, 바깥 공간에 걸린 작품 [낙원의 똥]은 마치 지나가는 새의 배설물로 더렵혀진 그림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그림은 도시의 교각 아래 수년간 쌓여 흘러내리고 있는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생로병사를 이어가는 도시의 비둘기가 떠오르지 않는 바도 아니다. 전시장 도우미가 하루종일 우두커니 앉아있어야 할 작은 의자는 또 어떠한가. 
 
그는 서울대공원, 어린이 대공원 등에 있는 동물원을 다니면서 사진으로 찍어 잉크 프린트로 이미지를 뽑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회화 작업을 하였다. 작품들은 색감이나 미묘한 명암처리를 통해 분명 어떤 분위기에 푹 젖어있지만, 작가는 과도한 감정노출이나 어떤 객관적 상황을 설명하려는 의도 없이 쿨하게 상황을 직시한다. 지난해 한강시민공원을 소재로 한 첫개인전처럼, 여전히 ‘살-풍경’(전시부제)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거칠게 썰렁하기만 한 그림과도 차이가 난다. 한강 시민공원 풍경도 그러했지만, 노충현은 현대적이면서도 현대의 뒤안길에 비껴있는 특수한 공간들을 주목한다. 그는 얼마 전 지나갔거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시대의 공간들을 하나의 터널처럼 통과한다. 작가는 한강시민공원과 동물원을 ‘도시의 안에 있지 않은 공간’,  전자는 ‘사이’에 놓여있고 후자는 밖에 위치해 있다고 말한다.
 
바깥에 존재하며 이곳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작가의 위치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미래의 책]에서 바깥의 공간을 사막과 비유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예술은 ‘일요일의 산책꾼들이 둘러보는 작은 환상의 성벽이 아니라, 동요하는 사막의 한복판에서의 한걸음 진전이기 위한 것’이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바깥의 공간인 사막은 ‘자리 없는 공간이고 생성되지 않는 시간’(블랑쇼)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헤맬 수 있을 뿐이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없는 시간이다. 노충현이 그린 바깥의 공간은 텅 빈 하늘과 헐벗은 불모의 땅이다. 그러나 이 바깥의 공간은 작품의 가장 내밀한 지점이기도 하다.  노충현의 동물원은 동물의 재롱이 벌어지거나, 동물의 비참한 상태 등이 묘사되지 않는다. 아무 사건도 없이 불안한 침묵이 감도는 그곳은 주인공이 없는 빈 무대처럼 보인다. 작가는 동물원 실내에서 연극적인 무대를 본다.
 
작품 [놀이 방], [서커스], [훌라우프], [뿔] 등에는 무대같은 빈 공간에 널린 소도구들이 놓여있다. 실내 공간에 설치된 것들은 붉은 색 플라스틱 공, 어린이용 자전거, 타이어, 집, 훌라후프, 정수기 물통, 어린용 자동차, 플라스틱 바구니, 플라스틱 그네 등이다. 이 물건들은 동물들을 위해 비치해 놓은 것이지만, 대부분 인간들이 쓰는 물건들이다. 인간중심주의로 물든 사물들은 이 공간의 주체와 어긋나면서 서로를 타자화 시킨다. 이리저리 뚫린 구멍을 연결짓는 붉은 사다리는 작품 제목처럼 붉은 거미같은 괴물로 다가오며, [놀이방]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붉은 공은 장난감이 아니라, 목을 메는 올가미처럼 보인다. 자연 또한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놀이방]의 바닥에 칠해진 녹색 방수페인트는 초원에 대한 허접한 시뮬레이션이다.
 
작품 [밀림]은 콘크리트 벽면에 그려진 자연 풍경을 보여주는데, 푸른 하늘이 약간 보이는 뭉실뭉실한 구름 풍경 위에는 이 공간을 조종하는데 쓰이는 스위치 같은 형태가 붙어있다. 동물원의 동물보다는 동물원 관람객을 위해 그려놓은 듯한 시뮬레이션 된 자연은 페인트가 벗겨져 나가고 동물의 배설물로 더렵혀져 있다. 빈 공간과 정체모를 사물들의 만남은 이 무대를 부조리극처럼 보이게 한다. 노충현은 주인공들과 무관한 이 사물들에서,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한 나무--그 나무는 작품 속 주인공들이 몸을 숨길 수도 심지어는 목을 멜 수도 없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물이다--의 예를 떠올린다. J.L. 스타이언은 그의 연극론에서 부조리 극의 역사적 배경을 논한다. 그에 의하면 부조리 극은 2차대전 직후 파리의 연극계에서 부상하였는데, 이러한 사조가 분출하게 된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근자에 벌어졌던 잔혹한 전행, 가스 처형실, 핵폭탄 등에 대한 허무주의적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에 의한 대량 살상은 한 시대의 배경을 넘어 현대사회의 영원한 조건이 되지 않았는가.
 
부조리 연극은 실존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했으며, 목적이 없는 듯한 세계의 무력함과 무용성을 표현하였다. 베케트의 작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출생이라는 강제와 죽음이라는 더 나쁜 강제 사이에서 보내는 참을 수 없는 감금 상태’(리차드 코)같은 것을 표현한다. 노충현의 동물원 속 보이지 않는 동물은 그의 어떤 작품에 나오는 제목처럼 일하거나 사냥하지 않아도 생존이 보장되는 '낙원'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관리하는 체계 속에서 목적 없는 삶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작품 [물그릇]에서 보여지는 생경한 금속 배식판은 살아있는 것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보이지 않는 체계를 압축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라고 얼마나 다를손가. 노충현의 작품에는 완전히 동물의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냉혹한 삶의 풍경을 통해 부정적이고 생기 없는 삶이 나타난다. 부조리라는 용어 뒤에는 무목적성, 고독, 정적, 악몽 같은 단어들이 따라온다. 물론 노충현의 작품은 시대를 비판하거나 고발하려는 교조적 의도보다는, 실제상황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예술 고유의 힘을 이용하려는 편에 속한다.
 
그의 작품은 추상화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묘사나 메시지가 없다. 상황의 단조로운 반복성과 메마름이 강조됨으로서 감옥과도 같은 유폐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스타이언은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가 수많은 감옥에서 공연된다고 한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 난해한 현대예술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노충현의 작품에서 동물원은 쇠창살로 막혀있다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보고 보여지며, 관리하고 관리되는 대상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도 감옥이다. 감옥 안에서의 단조로움을 견디라고 던져준 물건들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이러저러한 소비품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는 쇠창살의 지배를 받는 현대 인간의 삶 자체가 감옥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극일 뿐이다. 부조리 극의 무대는 단순한 공간으로 이루어진 거의 텅 빈 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사건이 텅 빈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느낌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노충현의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그것은 누구와도 현실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태, 자신과의 관계조차도 단절된 상황이다.
 
작품 [무제]에 드러나듯, 땟국물 줄줄 흐르는 타일 룸 아래로 뚫린 출입구들은 그곳이 동물 우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작품에서 바깥으로 뚫린 듯한 작은 창이 유폐의 무거움을 덜어내기도 한다. 노충현의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색은 고여있는 물, 요컨대 부유물로 뿌옇게 된 구정 물같은 색이며 물때가 낀 색이다. 현대인은 끝없이 탈주를 외치지만, 그들의 욕망은 마땅히 흘러갈 곳이 없다. 어느 작품에서는 은은하게, 또 어느 작품에서는 우중충하게 나타나는 색은 도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도시에서 태어나 살고 죽는 비둘기 색이다. 노충현의 작품은 중간 톤의 색채로, 실외 풍경이든 실내풍경이든 광원이 명확하지 않고 극적인 명암의 연출이 없다. 작가는 첫 전시 '살풍경'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약화시킴으로서 사물의 무게감을 줄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는 공간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약화시켰다. 뿌연 스모그가 낀 풍경을 그린 '살풍경'과 달리, '자리'전은 어떤 자연 현상과 비유될 수 있는 광원이 없다.
 
[훌라후프]가 예외적인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내리쬐는 외광을 묘사했다. 그러나 그 빛은 대상의 견고함 보다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바위 절벽의 가짜스러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극적인 차이에 의한 움직임, 생동하는 느낌 보다는 무엇인가가 정체되어 있고 고여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페인트가 벗겨져 나가기 시작하는 자연의 시뮬레이션처럼 진정 살아있는 운동감을 산출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거대한 에너지의 저장소였던 자연이 아니라, 죽음의 충동으로 치닫곤 하는 욕망이 고여있는 무의식의 저장소와 닮아있다. 그러나 노충현의 작품에서의 빈 공간은 그저 헐벗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신비함과 충만함으로 반전될 수 있다는데, 그 매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본질이다. 블랑쇼는 [미래의 책]에서 세계의 부재와 비어있음은 지극히 물질적인 현실의 근본 그 자체라고 지적한다.
 
격리와 비어있음을 통해 사물들을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격리가 그것들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며, 비어있음이 이미 그것들 속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예술가는 늘 인간과 사물 간에 모든 것이 지나가고 진정되고 느려지고 조용해지며 그 자체의 과도함을 내려놓는 평정의 지대를 설정하고자 한다. 뚜렷하지 않고 윤곽이 잡히지 않는 비어있음 속으로 퍼져나감을 통해, 진정한 형상과 내밀한 크기가 말해지고 보여지고 드러난다. 불가해한 침묵이 엄습하고 있는 노충현의 그림은 사라짐이라는 본질을 향해서 간다. 그의 작품은 블랑쇼가 언급한 현대예술처럼 확실하고 단정적인 실체가 아니며, 형태들의 총체도 아니고 파악 가능한 활동의 양식조차도 아니다. 현대의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창조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비어있음의 자리가 다가올 때 뿐이다. 노충현이 그리는 ‘자리’는 선조적으로 채워져야 할 순차적인 공간으로서의 자리가 아니라, 바로 비어있음의 자리를 의미한다.

이선영 /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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