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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거리두기

현대문명의 산업화․도시화가 초래한 인간의 ‘소외’는 현대 사회학에서 중요한 키워드이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문화적 권력의 존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진부한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논제가 진부하다는 이유에서 그것들이 기정사실화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가가 이러한 진부한 사실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독창적인 접근방식으로 그 비판적 시각을 환기시거나 발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김성수의 회화작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된다.

김성수의 회화적 시선에는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가 존재한다. 거리두기를 통해 인간소외의 문제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방식이다.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 빠져들어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거리두기 방식을 통해 주변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과정을 거치며 대상들을 객체화시킨다. 따라서 이미지가 얼마나 사실적으로 보이느냐의 문제는 이미지가 본래의 의미의 영역으로부터 얼마나 명백한 거리를 둘 수 있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의미로부터의 거리는 반대로 현실로 향하는 척도로 읽혀진다. 물론 여기에 반영된 실재(reality)에는 작가가 바라본 현실에 대한 비평적인 시각이 담겨있다.

개인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희생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김성수의 작업은 출발한다. 개체로서의 인간과 이를 지배하는 사회의 집단적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역학관계를 인물과 건물, 공간, 도시환경의 주제로 확장해 나간다. 건물의 창문이 그려진 그림들을 하나씩 조합하여 전체적인 거대한 파사드 벽면을 구성한 ‘파사드(Façades) 시리즈’는 획일화된 주거공간에서 번호가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대신하는 익명의 공간을 묘사한 작업이다. 한편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암묵적으로 따라하도록 요구하는 동조성은 ‘유니폼’을 통해 조장되고 강화된다. ‘카라마드(Caramades)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교복 제도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인간상을 다루고 있다. 졸업앨범 속 인물들은 고유한 개성이 사라진 채, 타자에 의해 부여된 집단적 개념이 정체성을 대신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소외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미스터 리(Mr. Lee) 시리즈’는 집단적 효율성을 위해 개성이 상실된 서로 비슷하게 닮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과대 포장된 ‘꽃’ 시리즈는 보다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허상을 추종하는 외형지상주의의 사회적 태도를 비유하며, 자연스러운 생명력을 잃어가는 실체와 그 이면을 감추기 위해 환영적 이미지에 집착하는 위선적 태도를 시사한다.

몇 년 전부터 김성수는 네온의 색채로 포장된 도시의 풍경과 아이콘, 그리고 인공적인 모습의 인물들을 통해, 번창해 가는 도시의 이면에 내재된 도시인의 정신적 공허와 부재를 가시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물질화된 도시 문화의 풍요로움은 네온 빛의 밝기에 비례하듯 더욱 더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있지만 그 곁에는 짙은 폐단의 그림자가 동반자의 모습처럼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경험한 부재의 시간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선과 거리두기로 한국 사회를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급변하는 한국 문화의 흐름 속에서 일종의 열광적 기운, 과열현상과 함께 부재감과 불안정한 심리가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물질문명이 지닌 양면성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변화를 느끼기 힘든 프랑스의 문화와 급속한 변화가 진행되는 한국의 문화 사이에서 양극적 체험을 통해 조성된 양면적·대조적 관점이 작업의 주요한 맥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에페메르 전시는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도시를 중심으로 범람하고 있는 소비 향락적 문화가 만들어 낸 화려한 시각적 환경을 반영한 회화작업이다. 전시제목 에페메르(éphémère)는 ‘일시적인’, ‘하루살이의’, ‘덧없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불어 단어이다. 45일간에 걸친 고된 벽화작업을 통해, 지하의 음습한 공간이 화려한 네온 불빛으로 포장된 현대적 도시의 인공적인 아이콘과 건축구조물의 풍경으로 변모되었다. 단색조의 강한 바탕 위에 중첩되어 뒤얽힌 네온의 아이콘들, 화소(pixel)같은 빌딩 창들이 집적된 네온시티 연작들은 내면적 깊이가 사라진 채 표피만이 발산하는 허상을 불러일으키면서 매트릭스적 가상공간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현대 문화를 잠식해가는 가상현실의 세계는 현실에 대한 그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듦과 동시에 두 차원 사이의 인식의 경계를 마비시킨다. 전시 마지막 날, 전시된 그림이 철거작업을 통해 사라짐으로써 이번 전시는 마무리된다. 순식간에 파편화된 그림 조각들은 새벽이 되면 황량함을 남기고 덧없이 사라지는 도시와 인간의 물질적 욕망처럼 공허한 신기루로 남겨지게 될 뿐이다. 이처럼 작업의 전반적 내용이 그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번 전시는 작업의 전 과정을 기록한 영상만이 남겨질 뿐이다. 작업의 결과만이 중요하게 전시되고 평가되는 기존의 회화 전시 관행과는 달리 그 과정을 관람객과 함께 공유하고 철거된 작품을 배포함으로써 전시 담론과 소통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였다.

김성수의 회화는 강렬한 원색의 톤과 완결된 필치로 인해 감상의 초점이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화려한 색채는 주제의 무거움을 완화시키기 위해 작가가 의도한 조형적 요소이며, 선명하고 정확한 묘사와 날카롭고 냉철한 터치는 감수성이 배제된 비개성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반복적인 연작으로 구성함으로써 작가는 기계적으로 대량 복제되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광고와 간판과 같은 소비문화의 단상을 드러낸다. 이처럼 인간의 삶의 본질을 변모시키는 현실적 메커니즘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반영함으로써 작가는 진부할 정도로 익숙해진 인간 소외의 사회적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객관적 세계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친숙한 환경과 대상을 낯설어보이게 함으로써, 냉철한 인식을 기반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황신원 / 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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