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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몸, 채널

 

지난 설, 사흘을 속초 본가에서 놀고, 귀경하는 길에 우리 가족은 곧장 서울로 향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빼, 그 저명한 장소, 정동진에서 하루 까먹으며 해 돋는 광경도 오랜만에 구경하자고 꾀를 내었다. 계획대로 하룻밤 잘 놀고 이튿날, 강릉 쪽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저기 어디쯤, 난데없이, 커~다란 군함 한 척이 상륙해 있었다. 놀다 가기로 하고 보니 그 옆에 새끼배 한 척도 같이 상륙해 있는데, 그 놈은 1997년에 침투하다 박살난 북한 잠수정이라고 했다. 커~다란 군함은 1997년엔가 언젠가 퇴역한 ‘전북함,’ 3700톤짜리, 길이 150여 미터, 승선인원 이백 오십여 명. 크다. 매우 크다. 들어가 구경하니 과연 크고 우람하고 복잡하다. 복잡하기를 사람 몸보다 덜하잖다. 오묘하고 신비하고 장엄하고 화려하다.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갖은 기계 장치와 회로와 장비, 계기, 가구, 무기, 도구, 각종 설비들이 어쩌면 저닿하게도 정교할 수 있는지. 그 자체로 매혹적이고 관능적이다.
 



헌데 이 거대하고 정교한 육신은 어떤 존재인가. 무기. ... 무기. 특정 제도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장치apparatus.’ 경찰 정복이 그렇듯이 그 자체로서 권위라든가 폭력적 위엄, 대화 대신 강요, 소통 말고 억압으로서 ‘스스로,’ 진짜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 그가 누리는 자유 앞에서 나는, 진짜로, 이 ‘세계’에 셋방살이하거나 기생하는 존재임을 새삼 인정한다.

내가 홀딱 벗고 서서 망연히 바래다가 발목서부터 무릎을 거쳐 서서히 몸 가라앉히고 잠입하며 육신으로 교접하는 그 바다를, 저 거대한 제도적 장치―전북함은 다른 방식으로 체험한다. 그는 내 육신이 바다를 사는 꼴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다를 보고 겪고 산다. 나는 천변만화하는 생명의 동태와 생리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철학적 상징으로서 바다를 겪고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지만, 전북함에게 바다는 하나의 길이요 때로 늪이다.

그 근처 산 중턱에는 ‘통일전시관’이 있어서 거기, 침투하다 몰살된 간첩들의 유류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거기 가 구경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 참아도 난다. 이를 꽉 깨물어도 눈물은 난다. 참다 참다 안돼서 밖으로 서둘러 나와 그 앞마당 끄트머리에 서서, 동해, 그 시퍼런 바다를 바래면 또 눈물이 난다. ... 그 산기슭에 널려있는 해당화 나무를 만나도 눈물이 난다. 낭만의 싸이트, 정동진, 거기 가면 눈물의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새삼.

 

군함을 비롯한 군사적 제도, 군사적 장치, 군사적 채널들에게는 독특한 시선과 귀, 감수성, 취향, 서정, 논리, 신념, 철학, 그리고 주파수가 있다. 그런 것이 그의 됨됨이를 이루고 나는 그의 됨됨이의 레이더에 포착되어 있다. 우리가 그를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농담이고, 실은 그가 우리를 사용한다.

어쨌든 나는 지난 설, 그 거의 맹목적인 낭만의 싸이트―정동진 근처, 어느 거대한 주검, 거대한 무덤, 거대한 제도 앞에서 그 육신에 대하여 맹목적인 매혹을 느끼면서, 한편, 그 육신이 작동하는 ‘인문주의적 섭리’ 앞에서 한없이 서글프고 나약한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

내가 그들―전북함과 북한 잠수정―을 그리고 있는 까닭이 이렇다. 어쨌든 두 양반은 지금 죽었지만 더더욱 생기를 띠고서 내 앞에 근엄하게 살고 계신다(왜 저것이 우리 아버지보다 쎈가). 두 개의 죽음, 두 개의 삶. 죽음이자 삶인, 죽음살이이자 삶살이인 두 육신. 저 찬란한 죽음, 저 찬란한 삶.

앞으로 한동안 저 ‘무덤’에 갇혀 살 것 같다. 저 무덤은 나를 비웃고 꼬시고 쥐어박고 어루만지고 각성시키고 좌절시킬 것이다. 그러다 끝내, 어쩌면 고맙게도, 나를 무언가로부터 해방시켜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박진화 투로 말하면, “가자, 가 보자.”

 
김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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