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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play)와 연출(display) 사이에 펼쳐진 스펙터클
 
이번 전시에서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는 전시부제 그대로'Super Mega Factory'가 된다.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가 내포하는 공간의 균질성과 순수함은 한 평면에 공존하기 힘든 이질적 장소들이 병치된 헤테로피아로 변모한다. 갤러리 입구부터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리는 간판을 통과하면 신기루나 만화경 같은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다양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세 개의 공간으로 구별된 전시실은 가벼운 오락물부터 묵직한'파인 아트' 컬렉션에 이르는 여러 차원의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장이다. '예술'을 대신한, 과도할 만큼 많은 사물과 이미지들의 쇄도 아래에서 관객은 종종 길을 잃을 것이다. 김기라가 연출한 무대들은 길을 잃어가면서 길을 찾아가야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즐기면서도 뒤통수를 잡아끄는 인력에 의해 방금 지나쳐온 사물과 기표들의 의미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밖에도 많은 이중성이 있다. 어지러운 공간적 유희 가운데에서도 길을 찾아가는 보이지 않는 실 꾸러미가 존재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내용과 형식들에서 낯설고 불편한 사실과 진실들이 드러난다. 수많은 곳에서 발췌한 문화적 코드에는 그것들을 관통하는 권력의 자기 동일성이 숨어 있다. 몰아치는 기표들은 아우성 속에서도 침묵하며, 침묵 속에서도 나지막이 발언한다. 예술적 순수주의에 대한 거식증은 문화적 폭식증을 낳았으나, 그렇게 해서 총동원된 것들은 다시금 예술화된다.
 
1층과1층 전(前)실이 대체로 대중문화의 코드로 채워져 있다면, 2층은 고색창연한 예술적 코드가 관통한다. 그러나 기존의 것으로부터 인용하거나 전용하는 전략이나, 구성요소들 간의 유기적 관계가 없이 수평적 컬렉션의 형식을 가진 점은 공통적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이중의 수식어(슈퍼, 메가)가 붙은'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자연이 아닌 인위적으로 생산된 현실에는 조절과 조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는 거시적인 차원이든 미시적인 차원이든 권력에의 의지가 관통한다. 김기라의 작품은 거대한 공장으로 치환된 현실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던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식의 주제가 쉽게 경도되곤 하는, 잘 정돈되고 이성적인, 요컨대 계몽주의적인 어법이 아니라, 어지러운 현실에 어지럽게 대응하는 동종요법으로 실현되고 있다. 관객들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기표의 홍수들에서 작품의 메시지를 각자 알아서 챙겨가야만 할 것이다. 전시장들은 일종의 자본주의의 축소모델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현실이 모델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차원이 삭제되거나 첨가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독창성은 전대미문의 내용이나 형식의 발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분명치 않았던 차원의 발견에 필수적인 징후적 순간들에 놓여있다.
 
1층 전실 입구에 있는 작품 「위대한 업적을 위하여」는 꼬마 권투 선수가 다운당하는 장면을 담은 조각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으로 얼룩질 인생에 대한 축약이기도 하지만, 각종'슈퍼'와'메가'와 대결해야 할 관객이나 작가의 입장이기도 할 것이다. 어린 권투선수에서 보이는 비극적인 정조는, 작품 「20세기 슈퍼 히어로즈_Monsters」에서 반전된다. 잠시 감상에 빠진 관객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양한 형태와 색채가 조합된 희화적인 두상들이 떼 지어 놓여있다. 컬렉션처럼 장식장에 안치된 스무 개의 두상들은20세기 대중문화에서 활약한 영웅들에서 발췌하여 만든 또 다른 괴물이다. 슈퍼맨이나 배트맨같은 대중문화의 영웅들은 그자체가 이미 괴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이들을 분해하여 더욱 과도하게 뒤섞는다. 한 도상에6-7개의 캐릭터가 짬뽕된다. 헐크의 침과 아메리칸맨의 날개, 베트맨의 뾰족 귀 등이 합성되는 식이다. 괴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구멍들로 연결된다. 이러한 조립을 통해 손쉽게 다른 괴물로 바꿀 수 있다. 이 괴물들은 육체의 구멍들이 무차별적으로 연결되고 접속되는 카니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의 기괴한 육체가 불순하고 불균형하고 직접적이며 구멍 뚫린 물질적 육체를 가지며, 이러한 점에서 카니발의 육체는 고전적인 육체와 대조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다음 전시실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주의의 축소판이 잠시나마 세계의 전도를 도모하는 카니발과 달리, 그것의 흉내내기에 불과한 놀이동산의 수준이라 할지라도, 범주의 경계를 흐리는 금기 위반의 행위에 내재된 위험한 요소가 무화되지는 않는다. 원시 목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태들은 현대를 주름잡는 괴물들이 원초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화적인 조작이 그러하듯, 작가는 개체의 자기 동일성을 이루는 요소들을 가지고 레고 블록처럼 놀이하면서 영웅들의 실체를 해체한다. 작품[위대한 업적!! 죽음으로!!」는 전쟁의 참상을 그린 고야의 작품을 인용한다. 참수, 사지절단, 거세로 물들어 있는 잔혹한 장면을 양철인간, 피노키오 머리, 희생을 강요당한 아이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으로 바꾼다. 여기에는 전쟁이 약자를 희생시킨다는 기본적인 메시지 외에, 덧붙여진 것이 또 있다.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회화를 아이들이 흔히 접하는 동화나 우화로 변화시키면서,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전쟁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한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전쟁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가운 전쟁으로 변모했다. 죽임을 당한 이들은 모두 인간(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캐릭터들로, 이들은 일찍이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어른으로 대변되는 인격적 성숙을 차단─'키덜트'로 범주화되기도 하는─하는 자본주의 문화의 유치증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석되든 이러한 우화는19세기의 리얼리즘 못지않은 잔혹극 속의 현실을 가리킨다.
 
전실을 지나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스펙터클로서의 선전도시'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공간의 반 정도가 극장으로 연출되었고 전실에서 이어지는 사인 작업들이 벽면을 장식한다. 자본주의적 현실을 압축적으로 재현한 듯한 이 미니 도시는, 소비문화의 성전으로 가득한 현대 도시 자체가 이미 이미지와 메시지로 가득한 스크린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쇄도하는 메시지의 수신자들은 곧바로 소비자로 간주된다. 그들은 문화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문화를 소비함으로서 온통 문화로 포장된 자본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질서를 내면화한다. 20세기 대중문화를 지배했던 헐리웃 영화사의 로고가 숫자만 하나 덧붙은 채, 만들어지자마자 낡아버린 기념비처럼 서 있고, 양철 인간이 멜랑콜리한 표정으로 조악한 극장 간판을 내려다본다. 가건물처럼 만들어진 극장은 실제의 경험을 대체하고 그자체가 보편화된 코드로 유통되는 되는 현실을 다룬다. 광고판에는'이 시대 최고의 행복한 세상이 열린다', 'we are the one', '하나가 아니라면 죽어도 좋다, 세상이 변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 등등의 메시지가 써 있다. 작가는 문화의 대량 소비가 이루어지는'신기루 궁전'같은 장소를 다소간 썰렁한 방식으로 소격시킴으로서, 각지의 인간들을 지구촌의 세계시민으로 만들고, 소비적 차원에서 보편적인 경험을, 그리고 생산의 차원에서 보편적인 경쟁을 낳는'하나'의 실체를 드러내려 애쓴다.
 
헐리웃의 영화자막은 발췌 변형되어 조각으로 만들어져 극장에 설치되고, 이 조각은 다시 영상에도 등장한다. 발췌한 이미지를 조각으로, 이를 다시 영상으로 변모시키면서, 기표의 변화무쌍한 존재방식도 드러낸다. 극장 안에서 상영되는 작품 「universal experience」는1분30초 분량의3D 애니매이션으로, 로고 뒤의 지구가 폭발 직전이다. 축제의 폭죽 대신에 전지구적 차원의 전쟁이 예시된다. 영화 스타워즈 도입부 장면까지 동원된 영상 뒤에는 암흑만이 펼쳐진다. 굉장한 무엇이 등장할 것처럼 관객을 유혹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락의 허무함이 드러나 있다. 실체가 없기에, 그리고 소비자의 주머니를 노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기에 과장될 수밖에 없는 선전의 메카니즘이 싸인 작업을 통해 전달된다. 네온싸인으로 만들어진 「we are the one」과160개 이상의LED 전구로 만들어진 「I love u」는 흔해빠진 광고문귀의 형식을 빌림으로서, '하나'나'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변형시킨다. 사실 그것은 소비사회에 필요한 메시지이자, 전체주의적 정치질서에도 통용되는 메시지인 것이다. 취향이'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흥행이 안 되고, 상품을'사랑'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주기가 끊어지고 만다. 그것은 천재지변 못지않은 재앙으로 간주된다. 모든 다양한 존재를 소비자라는 단일한 코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붉은 색의 지옥이, 돈이 있는 하얀색의 천국이 열리는 작품 「hell, heaven」처럼, 자본의 이익이라는 동일성의 질서에 동화되지 못하는 타자들을 배제한 슬로건들로 가득 차 있다.
 
2층은'권력으로서의 방'으로 연출되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걸린, KKK단을 연상시키는 흰 두건을 쓴 초상은 우리 근대사에서 학살사건을 주도 했던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것으로, 사회적 소수를 죽이는 캐릭터를 상징한다. 이 작품으로부터 연결되는2층의 전시장은 황금빛 액자 안에 안치된 고색창연한 회화적 양식에 의해 근대를 지배했던 좌우익 파시즘과 제국주의를 나열한다. 조각은 물론 역사화, 정물화, 인물화, 그리고 자수 작품까지 두루 구색을 맞춘 전시장은 자못 미술관 분위기를 회복하는 듯하지만, 내용물은 여전히 코믹하고 키치적이다. 소조에 대리석 가루를 뿌려 완성한 「성 히틀러 상」은 히틀러가 성모상으로 변장한 가증스러운 모습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선악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종교와 파시즘의 내연관계를 파헤친다. 마르크스, 엘리자베스2세, 히틀러 등 좌우익은 물론 봉건체제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줄줄이 호출되어 심하게 얻어터진 모습으로 코믹하게 변형된다. 여러 양식과 시대가 공존하는 이 역사적 인물들은 현실감을 가지기 보다는, 매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되어 가필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인물의 허구적 위상이 부각된다.
 
600호 크기의 대형그림을 포함하는 역사화는'2009년에 그려지는20세기의 역사화들'이다.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단일한 형식 내에 이질적인 시공간이 뒤섞여 있다. 전쟁이나 재난을 담은 고야, 들라크루아, 피카소 등의 대가의 그림 구도를 빌어 중동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학살 장면을 중첩시킨다. 「서방의 학살_아름다운 희생자」라는 작품 제목은20세기에 일어난 비극적 전쟁들이 서방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유일의 질서를 선포하면서 그것이 관철되지 않는 영역들을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해 벌인 전쟁들을 그린다. 여기에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자본주의가 또 다른 근본주의가 되어 위험한 충돌을 야기 시켰다는 시각이 내포되어 있다. 작품 「아름다운 희생자02」는 참수당한 성 요한의 얼굴 초상화를 작가의 얼굴로 변형시킴으로서, 자신을'아름다운 희생자'의 대열 위에 놓는다. 작가는 참수당한 성인의 마스크를 빌어 현 세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내비친다. 차용된 이미지는 묵직한 유화로 각색되지만, 위에 텍스트를 새겨 넣음으로서, 방금 들어온 핫뉴스 같은 양식을 부여한다. 이 역사화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할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지만, 곧 재빠르게 채워질 또 다른 뉴스들에 묻혀 버릴 것이다.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 한 면에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희희덕거리는 오락물과 뒤섞여 있곤 한다. 이러한 무심한 병치들을 야기하는 지배적 매체로서의 대중매체의 속성이 진정 더 위험한 학살을 야기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일상의 차가운 전쟁은 물론이고, 진짜 피 흘리는 뜨거운 전쟁이 빈발하는'위험 사회'가 된 것은 세계화의 결과이다. 조각과 회화의 양식들로 채워진 공간에 다소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자수 작품 「historical UN as a flag]는 이 전시의 결론 부분을 요약하는 듯하다. 천위에 자수로 월계수 잎으로 감싸인 지구가 붉은 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마치 지구 전체가 열병을 앓으며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이 지구무늬 천은 약자나 희생자의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이윤을 짜내려는 다국적 기업의 깃발과 더욱 잘 어울린다. 범선을 그린16-17세기의 장르화에서 인용한 현대의 유람선은 근대를 열어 제친 대여행의 시대가 원료를 공급받고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 벌린 식민지 확장 전쟁과 동일선 상에 있음을 예시한다. 미지의 곳을 향하는 낭만주의적 탐색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동일자의 원리를 타자에게 강요하는 가혹한 게임으로 진행되곤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인용하면서, 인류의 역사에서 타인의 타자성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 전략이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뱉어내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치우는 전략이다.
 
첫 번째는 교정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이질적으로 간주되는 타자들을 뱉어 토하는 것이고, 두 번째 전략은 이질적 내용을 비이질화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인들의 몸과 정신을 섭취하고 먹어치우고 신진대사를 거쳐 그 섭취하는 몸과 별반 차이가 없는 동질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전략 또한 식인 풍습에서부터 강제적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첫 번째 전략이 타자를 추방하거나 전멸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두 번째는 그들의 타자성을 유예시키거나 무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유람선을 그린 그림은 김기라의 다른 작품 「we are the one」, 「universal experience」처럼, 동일자에게 귀속되지 않는(될 수 없는,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다양한 타자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들추어낸다. 김기라의 작품은 타자를 눈에 보이지 않게 갈취하는 미시권력도 작동하지만, 안되면 결국 피를 흘리는 희생을 낳는 거시권력의 존재도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미시권력이든 거시권력이든, 권력이란 것은 그 본질을 직접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에, 인용이나 알레고리라는 간접적인 방식을 활용한다. 예술작품을 포함하여, 현대사회의 여러 차원을 관통하는 언어들은 기표와 기의, 그리고 대상 사이에 널찍하게 벌어진 거리(차이, 차연, 해체)를 인정함으로서, 이러한 유희를 가능하게 했다. 김기라의 작품은 다양한 차원의 언어적 틈새에서 놀이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깊은 동조적 슬픔부터 냉소적인 태도에 이르는 감정의 진폭이 내재해 있다.

이선영 /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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