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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는 미술의 어떤 한 요소를 변색시키거나 이질적인 것을 교차시키는 색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간 그는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통념으로부터 비껴가는 자유로움을 보여주었으며,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적극적으로 사유하였으며, 미술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창작과정에도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한 그의 특징은, 미술계에서 그의 존재를 알렸던 월 페인팅(wall painting), 이른바 ‘시트지 설치 작업’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2004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정재호는 미술에선 다소 생소한 시트지라는 독특한 재료를 큰 벽면에 부착함으로써 시트지 특유의 인공적이고 강렬한 색채로 공간을 단번에 사로잡았으며, 나아가 평면과 입체, 회화와 설치, 영속성과 일시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과거 그가 시트지 설치 작업만 했던 것은 아님)

“유포리아(Euphoria)”라는 제목의 이번 개인전은 유화로 제작한 회화, 시트지로 만든 월 페인팅, 디지털 드로잉 등 크게 3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지는데,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띠는 것은 12점이 출품된 회화 작업이다.

정재호의 회화는 ‘기억’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보통 사람들이 회상하는 과거의 기억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을 회상하는 순간의 상황과 관심에 따라 기억의 내용이 상당 부분 왜곡된다. 과거의 한 시점으로 정확하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후 일어났던 사건들이 기억에 첨가되기 마련이다. 즉 기억은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다.



우리 주변의 모습을 그리는 정재호는 먼저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멋있다고 느끼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어 그 사진 중 일부를 작업의 소재로 사용한다. 선택된 사진은 전적으로 그 순간 작가의 마음에 달려있다. 사진을 찍었을 때와 사진을 선택할 때의 느낌은 변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외부 환경 혹은 개인의 경험에 의해 그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릴 때도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리지는 않는다. 당시 작가의 내면 상태에 따라 이미지가 조합되는 방식도 달라진다. 여기에 논리적 구조가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작가의 엉뚱하고 뭉툭한 기억에 의지할 뿐이다. 게다가 관람객이 작품을 접할 때도 그의 경험과 관심을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따라서 정재호는 사진 찍을 때의 느낌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며, 동시에 현재 느끼는 작가의 감정, 호흡, 리듬 등도 가급적 살리고자 한다.

정재호는 사진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지만, 결코 사물의 투명한 묘사가 목적이 아니다. 그는 형상을 단순화·패턴화하고, 회화적 붓자국을 남기고, 차갑고 인공적인 색채를 부각시키고, 유리에 반사된 외양을 강조하는 등 여러 장치를 통해 구상회화 안에서 장식성과 추상성을 추구하고 있다. 더불어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표지판, 교통콘, 차양, 파라솔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 물건들은 도시에서도 특이한 색채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들이다. 꽃, 잎, 나무 등과 대비되는 이 인공물은 사람을 경계시키며 내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특색은 정재호가 첫선보이는 ‘디지털 드로잉’ 작업이다. 회화와 같이 이미 찍어놓았던 사진을 활용한다. 그는 사진을 컴퓨터에 옮긴 후 포토샵의 다채로운 기능을 이용하여, 마치 드로잉처럼, 선과 형태를 지우거나 첨가하여 이미지를 계속해서 변형시킨다. 최종 목표 이미지가 원래부터 정해져 있지 않으며, 수많은 수정 작업에 의해 이미지의 생성과 해체가 반복되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이러한 과정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디지털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수공성이 요구되므로 오히려 아날로그라고 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회화의 선긋기와 포토샵의 선긋기가 다르듯 자연스럽게 디지털의 뉘앙스가 나타난다. 또한 개인의 기억이 회화로 변환될 때 기억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질료를 만나면서 구체화되는데, 기억을 포토샵으로 처리하면 기억이 질료를 만나기 전까지의 단계에서 많은 것을 실험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포토샵에서 만들어지는 디지털 드로잉은 물리적 부피와 질량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회화로 전환되면 이미 형성된 회화적 담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상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드로잉을 하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과거를 회상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 아닐까?

정재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월 페인팅 <Euphoria>를 7일 동안 직접 설치하였다. (전시가 끝나면 스스로 월 페인팅을 제거) 회화를 전공한 그는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이 갤러리라는 타 장소에 걸릴 때 생길 수 있는 공간적 괴리감을 주목하였다. 그에게 있어 현장감은 작가와 관객이 소통하는 중요한 접점 중 하나이다. 또한 월 페인팅은 한정된 캔버스를 벗어나 거대한 공간을 사용하므로 해방감, 공간감, 우연성,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물론 영속적이지 못하다는 숙명도 지닌다.

시트지로 제작한 그의 월 페인팅은 회화의 물감과 비견될 정도로 인상적인 색채를 발산한다. 그는 잡지의 광고 이미지 및 상업 로고를 차용하여 월 페인팅을 구성하였기에 더욱더 자극적이고 복잡한 형상을 표현할 수 있었고, 비록 구상적 이미지라 하더라도, 그 결과 메인 이미지와 배경 이미지의 경계를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한편 정재호는 지난해 부산비엔날레에서 시트지로 벽에 월 페인팅을 설치한 후, 시트지로 만든 형상 사이에 캔버스(회화)를 걸었다. 회화에서 확장된 월 페인팅에 다시 회화가 비집고 들어가 있는 묘한 구조로 회화와 월 페인팅의 필연적 연관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번 개인전에서 그는 시트지 형상 안에 디지털 드로잉을 끼워 넣었다. 시트지와 디지털 작업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일시적 생성과 소비는 서로 조응을 이루며 창작과정에서 있었던 작가의 역동적 행위를 다시금 드러낸다.

‘유포리아’는 의학적으로 쾌감과 행복과 관련된 감정 상태를 지칭하며, 속어로는 마약에 의한 일시적인 도취감을 의미한다. 어떤 한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그는 일상에서 느끼는 순간적 감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하여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지각적 공간(전시장)을 꾸민다. 관객이 전시장에서 그의 작업을 마주하면서 행복도취감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풀어놓은 미묘하고 섬세한 예술적 감성은 아마도 전시장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할 것이다.

류한승 / 미술평론가,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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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여러가지 감정상태를 알 수 있는 작품 인것 같습니다.. 2010.11.24 1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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