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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명한 영화학자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Ozu Yasziro)에 대한 책을 썼을 때 그는 책 머리에서 "오즈적인 것"에 대해 질문한다. 그는 사람들이 오즈적인 것이라고 아무 불편 없이 사용하는 그 관념이 사실은 오즈의 영화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이 말이 오즈의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변화를 지각하지 못하는 무능과 연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오즈적인 것이라는 진술은 오즈의 영화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활용이 그 작가를 둘러싼 모순적인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오즈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꼴이지만 옥정호의 작품 안에는 '옥정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모든 작가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옥정호에게 이런 형용어구는 그의 작업 전반을 살펴보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옥정호적인 것'은 우선 본인이 직접 작품 속에 등장하면서 만들어진 효과이자, 쟁점화될 수 있는 민감한 사안들을 희화화된 방식으로 작업 속에 끌어들여온 작가 특유의 스타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작품의 정당성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낯익은 작품 안 요소들을 배제와 수용이라는 배타적인 필터로 판단하는 오류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위치로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관객의 속성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관람객은 작가의 위치에 설 수 있다. 단지 옥정호 작품에 대한 최악의 관람 방식은 그가 선택한 태도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품을 대하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저널리즘의 이미지 교육이 만들어낸 선입견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입견은 '옥정호적인 것'이라는 표현으로 발화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옥정호 자신은 항상 저널리즘의 싸구려 이미지들 안에서 자신의 작품을 시작해 왔다. 그는 티브이, 영화, 신문, 일상생활의 이미지와 같은 무한한 소스 안에서 작업의 참조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통의 시발점으로 착상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항상' 조건 지워져 있는데 이것을 파악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을 작품에 대한 해석의 단초로 선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옥정호적인 것'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속성이다.



 옥정호는 〈메이드 인 차이나〉 연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의 한 장면을 빌려오고 있다. 위의 영화들은 표면적으로 어떤 연관성을 가진 것 같진 않다. 작가 자신은 이 영화들이 무국적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느슨한 연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보면 이 가운데 일견 내셔널 시네마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만한 영화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국적성이라는 것이 영화의 배경이나 네러티브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 연작은 그 자체로 영화와는 무관한 물리적 폭력의 네러티브를 형성하고 있다. 〈킬빌〉의 일본도, 〈JSA〉의 살인 현장, 〈넘버3〉의 무기로 사용되는 재떨이, 〈올드보이〉의 고문용 장도리, 〈캐스트 어웨이〉 정도가 예외일까?
그리고 그 근처에는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그 스티커는 각 영화의 고유한 특수성을 무력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며 옥정호는 단지 그 영화의 한 순간만을 빌려 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영화를 기억의 이미지로 기억하며, 영화 역시 관객들을 위한 기억의 장소를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옥정호는 영화의 이러한 장소를 선택하여 그 긴장의 순간에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붙여 버린다. 그러나 '메이드 인 차이나' 스티커는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그 기호는 각인되어 있지 않다. 다분히 역사적인 기억을 담지 하는 이 스티커는 그러나 연작 시리즈 내부의 폭력적 네러티브를 해소하는 역할도 병행한다. 위의 영화들이 환기하는 폭력적 네러티브의 골이 그리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이 시리즈에서 느끼는 웃음은 쉽게 도출되기 어려운 것이다. 옥정호는 〈기념사진〉에서 국회 지붕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라는 진절머리 나는 론스타적 메시지도 희화화 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곧바로 옥정호는 차이나 타운으로 옮겨가 '메이드 인 코리아'의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차이나 타운 '메이드 인 코리아' 깃발을 흔들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메이드 인 차이나와 같은 공간에 전시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두 작품은 일종의 액자구조, 즉 미장 아빔(mise en abyme)을 형성한다. '메이드 인 차이나' 시리즈가 다층적 이야기와 문화가 교차하는 영화를 배경으로 했다면 이 작품에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인 차이나 타운을 선택했다. 물론 '중국'이라는 기호만 간직하고 커뮤니티가 갖춰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일개 관광 음식 단지라는 사실을 통해 중국과 남한 사이에서 모호하게 떠도는 차이나 타운의 무국적성이 발견 되기도 한다. 국제 공항과도 같은 차이나 타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나 타운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차이나 타운이 인정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장소의 존재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그러니까 차이나 타운은 급조된 마을의 무-역사성과 실제 존재 사이에서 끊임 없이 흔들리는 장소이다. 급조된 차이나 타운은 남한과 중국의 관계뿐 아니라 남한의 개발 이데올로기의 기억을 점층법적으로 드러낸다. 이 순간 중국 동네는 '말 그대로' 남한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가 된다.
'메이드 인 차이나' 스티커가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잠식당한 이상주의의 아련함을 환기시킨다면, 과거 홍위병이 흔들었을 법한 붉은 깃발 속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문구는 다양한 정치적이고 급진적 투쟁과 요구가 독재와 개발의 이데올로기로 대체된 현재 상황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 상황이 고착화된 계기는 '영어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서부 총잡이' 속에서 발견된다.




옥정호의 작품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층들의 무의식적 상태를 표시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이 이미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위계화 되어 있는데 옥정호는 희생자, 선동가, 배우, 익살꾼, 인형, 사회적 약자가 되어 작품들을 경유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옥정호의 작품들이 주는 뉘앙스는 절대로 부정적이지 않다. 그는 긍정의 용법을 활용하는 작가이며 긍정을 통해서만 부정의 수사를 환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웃음을 통해 도출되든 혹은 아련한 연민이 되든 긍정의 흐름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작품 내에서 정당한 주체가 되고 있다. 여기서 주체는 작가의 위치가 아니라 작가적 실천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과거 가공이 쉽고 값이 싸서 많이 사용되었던 플라스틱은 이제 자연 소재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플라스틱은 3세계 공장을 중심으로 생산되고 그 상품들은 전지구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옥정호가 이번 전시에 "자유로운 플라스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메이드 인 누구"라는 딱지를 달고 있는 플라스틱 상품이 가진 근본적인 자유로움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이나 인종, 국경을 초월하는 물자의 이동은 또한 전지구적 흐름이 가진 근본적인 긴장과 모순을 담지 하는 하나의 표식으로 전유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자유로움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흐름을 어떻게 윤리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선정적인 가치 체계 안에서 투쟁의 흐름을 작동시킬 수 있을까?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활력이 만들어낸 이미지 안에서 착상 되었을지도 모를 이번 전시에서 옥정호는 그 자유로운 이미지의 피상성, 즉 시공간의 기억을 점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피상성과 모순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위의 질문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임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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