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ve

검색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거울과 유리창은 내부의 텍스트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그들의 지향점은 다르다. 거울은 내부를 선명하게 반영(일정 정도의 왜곡은 있지만)한다는 점에서 내부 지향적 텍스트이다. 반면 유리창은 내부를 희미하게 반영하고, 시선을 외부로 확장 시킨다는 측면에서 외부 지향적 텍스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유리창에 반영된 피사체는 확장되는 시선을 가로막는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유리창이 필요하고,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얼룩’이 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유리창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얼룩’을 단순히 외부 지향적 시각을 저해하는 요소쯤으로 간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답을 구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얼룩’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얼룩’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유리창의 맺힌 잔상을 추적해보면 그것의 정체는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며, 자신이 서 있는 내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희미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마치 거울을 대면하고 있을 때와 같이 지금-여기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유리창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외부 풍경이다. 그러기에 유리창은 ‘희미한’ 내부와 ‘선명한’ 외부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유리창에 항시 내재된 것이지만,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제3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던 ‘얼룩’의 정체는 유리창이 제3의 공간임을 알리는 하나의 명확한 지표이다.





항상 존재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곳에 지표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작업(2002년 Sadi 윈도우 갤러리 설치 작업)으로 시작해보자. 유리창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안과 밖을 구분한다. 우리는 유리창을 이것과 저것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하나의 경계선쯤으로 인식한다. 내부에서는 안을 보기 위한 창문으로, 외부에서는 안을 들여다보기 위한 쇼 윈도우로 말이다. 그러나 서혜영은 단순히 안과 밖으로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공간이 그곳에 있음을 인식한다. 그들이 중첩하며, 충돌하고, 소통하는 공간을 포착한다. 그곳은 바로 유리창 표면이다. 서혜영은 유리창이라는 2차원적 표면에 자신이 인지한 새로운 3차원적 공간을 재생시킨다. 벽돌 하나하나를 올리듯 그곳에 라인테이프(‘얼룩’)를 이용해 자신이 발견한 중첩과 충돌의 공간을 형상화 한다.

서혜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 내부에 투사된 외부의 빛을 형상화 한다. 그는 유리창에 붙어 있는 라인테이프가 만들어낸 내부의 그림자를 따라 또 다시 라인테이프를 붙여 나간다. 하나의 건물을 완성하듯 그는 벽돌을 쌓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이 유리창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곳은 외부를 응시하는 내가 서 있는 지점이며 외부의 빛이 투사된 지점이다. 그러기에 그곳은 유리창처럼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획에서 벗어나 있는 서로 중첩하며 충돌하고 발설하는 소통의 장이다. 이렇듯 서혜영의 작업에서 쌓여진 브릭들은 일견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유리창의 ‘얼룩’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브릭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그들이(안과 밖, 밀실과 광장 등 이분법으로 구획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상호간에 나누고 있는 소통의 언어다. 서혜영은 브릭 하나하나를 이어 붙이면서 그들의 언어를 추적하고, 듣고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 한다.

최근 작업에서도 브릭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브릭의 표현방법에 있어서 라인테이프에서 연필로(2003년 개인전에서 연필을 사용)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브릭은 그의 화면에 주요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브릭이 일정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연필로 그려진 브릭은 미세하여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그러나 화면에 굳건하게 밀착되어 있다. 즉, 캔버스 표면과 브릭은 한 몸이 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가 지금까지는 특정한 이분법적 공간을 탈주하는 출구의 지표로 브릭을 위치시켰다면, 최근의 작업에서 보이는 작가의 눈 자체가 브릭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브릭이 탈주의 지표로 사용되던 것에서 작가의 눈 자체가 탈주의 지표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브릭 위에 그려진 대상들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다. 그간의 작업에서 대상들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세부적 구체적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관념적 존재(마치 그림자처럼)로 제시되었다. 반면 최근의 작업은 작가의 삶과 밀착되어 구체적인 물질적 대상으로 제시된다. 그곳에는 일상의 소소한 사물, 풍경들이 자리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익숙한 대상들은 그의 정적인 화면과 조응한다. 그곳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고요하다. 자고 있는 아이, 작업실 주변의 풍경, 맨드라미, 오래된 아파트의 풍경, 책장 등 자신의 주변에서 쉽게 마주 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모두가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인식하는 주체의 시선이 닿을 때, 즉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를 할 때만이 그들이 인식소로 작동한다. 서혜영은 그곳에 자신의 시선을 부여한다. 그것은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자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브릭들이다. 이러한 그의 시선을 통해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일상의 대상들은 낯선 풍경으로 재맥락화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하게 펼쳐진 브릭을 타고 대상, 그리고 그것에 대면하고 있는 주체와 소통하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외부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관조적이고 정적이다. 그리고 그곳의 ‘얼룩’은 그것을 방해하는 저해요소이다. 그러나 서혜영은 오히려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리창 표면에 생성된 그러나 인식하지 못했던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의 캔버스는 무수히 많은 브릭들이 붙어 있는 유리창과 다름없다. 안과 밖을 가르면서 견고하게 서 있는 벽과 같은 유리창. 그러나 브릭들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 서혜영은 자신의 일상을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유리창의 ‘얼룩’을 지표로 읽을 수 있는 자가 인식한 낯선 세계가 담겨 있다. 관객들은 텅 빈 기표를 가득하게 만든 서혜영의 언어를 따라 그곳에 자신의 의미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관객과 작가의 게임(비우고(브릭) → 채우고(브릭위에 놓인 형상) → 비우고(작가의 형상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관객) → 채우고(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올려놓는 관객) → 또 다시 비우고(그것 마저도 비우는 브릭))이 지속될 때, 관객과 작가는 작가가 발견한 제3의 공간에서 ‘생산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게임을 기대해본다.

이대범 / 미술평론

여러분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세요? 작가정보 페이지 이동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댓글(0)

현재 0byte/ 최대 500 byte

등록

Quick Pag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