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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규의 그림에선 일러스트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의 화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설적이면서도 우화적인 메시지, 종이라는 재료 위의 단순한 색채 배열과 필치에서 나오는 속도감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자 장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일러스트는 그리려고 하는 대상의 원인에 귀속되기 보다는 그려진 그 대상이 자아내는 효과에 집중되도록 되어 있다. 관객에게 정보의 전달력을 높이려는 목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러스트는 그것이 방출하는 정보 이외의 깊고 넓은 파장을 만들기 힘들어 진다. 또한 개념의 직접적인 노출로 인해 ‘날 것’ 같은 생각들의 기록이 되기 쉽다. 내러티브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므로 일러스트는 이미지로 기록된 작가의 문학적 관념들이라 할 수 있다.
 
임태규의 그림은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던 온갖 비행하고, 부유하고, 갈등하고, 파고들고, 엿보고, 폭주하는 ‘주변인’이라는 틀 밖의 존재들에 대해 써내려간 그림일기와도 같은 것이다. 항상 화면 밖으로 탈출하려는 그들은 얼마 후면 폭발할 것 같은 금기된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들의 비행(飛行)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인지, 아니면 저 세상으로의 탐험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각종 동식물을 포함하여 황룡, 인어, UFO까지 등장시키는 그의 화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가 지구라는 땅 위의 족속들, 그 중에서도 ‘주변’이 아닌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들에 대한 은근한 항의를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던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르게 된다. 
때문에 임태규의 화면이 일견 장식적이고 가볍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내면은 매우 사회적이며 풍자적이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거대담론’의 전체를 부인하고 ‘소담론’의 파편을 중시했던 것처럼, 임태규는 개인 심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사적인 일상의 소재들을 사용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을 풀어 놓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또 하나의 지점은, 그가 그만의 스토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우선 그의 모든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는 일관성은 그의 색채 활용에서 비롯되는 데 그의 팔레트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안료를 사용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서양의 3원색의 틀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파랑(초록), 노랑(황금), 빨강(분홍)의 조합은 르네상스의 보티첼리의 배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임태규는 이런 색채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어려운 한지를 고집하고 있는데, 먹물이 젖어 있는 종이 위에 한지를 겹치고 연필을 통해 필선을 그음으로써 뒤에서부터 배어나오는 먹선을 형태의 윤곽선으로 처리하고 있다. 배채(背彩)가 아닌 배묘(背描)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묘법을 사용하니 필선의 맛과 색채의 발현이 이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채 모두 한 면의 종이 위에 균등한 가치의 색채로서 살아남게 되는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선은 가장 좁아진 색면(色面)인 것이다. 그것은 한지가 갖고 있는 중성적이면서도 중간자적인 성격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서양적이라 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을 동양적인 기법과 방식으로 담아냄으로써 임태규는 수묵화와 채색화라는 폐쇄적인 이분법의 구조 속에 질식되었던 동양화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를 한다. 강력한 위계질서를 여전히 과시하는 동양화단에서 어느 경향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자신만의 화풍을 시도하면서 결국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성의 표현 문제, 즉 사신(寫神)을 자신의 그림의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면 속에서 부드러운 모필로 남겨진 문향(文香)을 느끼기는 힘들지만 마치 날카로운 펜촉으로 새겨진 동판화처럼 대중적이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남겨준다. 그의 이미지나 캐릭터들이 어느 정도 도식화되고 도상화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문자-텍스트처럼 소통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임태규는 이번 전시에서 그의 대표적인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를 마무리짓는듯한 최신작 <에레혼(erehwon)>을 발표한다. 영국의 시인 새뮤얼 버틀러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에레혼>은 ‘어딘지 모르는 곳’을 뜻하는 ‘nowhere’의 철자를 거꾸로 붙인 것으로 이상향(utopia)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어릴적 “nowhere”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을 “노우훼어(no-where)”로 읽어야 할지 “나우히어(now-here)”로 읽어야할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철자 하나 차이로 그것은 극단적인 거리감을 조성하는 신비로운 단어였다. 임태규의 <에레혼>은 이런 현실과 초현실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자기의 터전을 떠나 날아가 버렸던(fly away home) 임태규의 자아가 이제는 ‘지금 여기’의 공간으로 귀환한 것일까. 그의 수많은 분신들이, 자신이 머무를 큰집(topia)의 안과 밖을 출몰하며 기쁨의 춤을 추고 있다.

이건수 / 월간미술  편집장,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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