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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최종적인 의미와 관념의 층위로 너무 손쉽게 미끄러져간다. 그러나 실상 관객의 단순한 관찰력 너머에 목구멍 속의 가시처럼 박혀서 매끄러운 사고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무언가 계속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다름아닌 감각이다. 때로 머리 속에서 명확히 조립되지 못하는 추상적인 사고와 개념이 좌절하는 곳에서 감각은 그 자신의 권리를 계속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감각이란, 물질 속에 스며있는 이미지의 흔적만이 아니라 그 물질이 인간의 오감과 맞닥뜨리는 장에서 발생하는 어떤 고집스러움을 말한다.

손정은의 <복락원(Paradise Regained)> <영원의 강> 앞에 서면 우리는 특히나 사고나 관념이라는 생선을 그저 목구멍에 꿀꺽하고 넘길 수가 없다. 그녀의 작업은 사고와 감각 사이의 이율배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감각은 사고를 설명해주는 자료가 아니라 오히려 사고의 방향을 제시하는 키워드이다. 오감을 적극적인 연결고리로 사용한 설치작품이라는 점은 그녀의 이전 작업과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번 작업들은 확실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좀더 존재론적 성찰에 맞닿아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이번 개인전에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반대로 생명과 자연이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끌어온다. 감각의 이율배반 혹은 감각의 고집. <복락원>이란 되찾은 낙원이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놓은 인공낙원이다. 애초에 되찾아야 할 것은 없다. 낙원 그 자체가 사후에 구성된 이미지인 것이다. 인공을 위해 자연이 이차적인 모방물로 선택되는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 그러나 인공의 창백함으로 무장한 우리는 어이없게도 플라스틱 나무와 박제된 새를 진짜처럼 느낀다. 은은하게 분사되는 향기와 새소리에 둘러싸여 우리는 플라스틱 나무에서 생명을 감각한다. 그러나 물론, 나무는 애초에 생명이 없는 것들이고 새는 이미 죽은 새이다(새의 경우는 더 끔찍하다. 작가는 이미 박제된 새를 산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새를 보고 박제할 놈을 골랐다. 박제는 수요가 작기 때문에 원래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곳은 사실 거대한 무덤이다. 그러나 감각의 이율배반은 이곳을 여전히 생명의 공간이라고 고집한다.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상실한, 거짓 생명의 공간. 오감이란 결국 우습다. 하지만 여기서 오감은 단순한 허위가 아니다. 그것은 무덤과 정원을 같은 곳이라고 선언하게 만듦으로써, 죽어도 죽지 못하는 그 어떤 존재를 끊임없이 불러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사고나 기억이 오감으로 하여금 죽음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죽음이란, 죽음 그 자체보다 더 공포스럽다. 결국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존재론적 공포다. 이 공포 속에서 사고, 기억, 감각, 이 모든 심리학적 단위들은 더 이상 각각의 안전한 권한에 머무르지 못한다. 이 뒤틀림. 이 정신병리학적 뒤틀림.

통증의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널드 멜작은 인공 뇌의 가설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그의 성과는, 서구의학이 데카르트 이래로 믿어왔던 통증의 기계론적 설명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마치 도미노가 연쇄적으로 무너지듯이, 통증(혹은 다른 감각)이란 외부의 물리적 충격이 정신에 기계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플라시보 약의 효과에서 증명되듯이, 물리적 충격과 정신의 관계는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통증을 비롯한 모든 감각은 허구적일 수 있다. 멜작은 만약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가 우리의 뇌만을 따로 통 속에다 배양하고 있어도 뇌 속의 특정 신경모듈을 자극하면 우리는 여전히 외계의 사물들을 보고 듣고 냄새맡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통 속의 뇌가 느끼는 이 감각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인가? 진실인가? 멜작의 가설처럼 손정은의 인공낙원 속에서 존재와 부재는 서로를 침식한다. 그 어떤 것도 매끈하게 삼킬 수는 없다.

<복락원>에서 제시됐던 감각의 이율배반을 <영원의 강>은 메타적으로 되풀이한다. 공업용 방부액이 들어있는 4,800개의 ‘유리컵 강’은 죽음을 향해 한단계 더 다가간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유리컵의 아름다움은 결코 강의 흐름을 지시하지 않는다. 사실, 강처럼, 시간은 흘러가야 하고 기억은 잊혀져야 한다. 그러나 4,800개 유리컵 속에 정지된 감각의 집요함은 시간을 공간화해버림으로써 또 한번 죽음을 은유한다. 갇혀있는 공간의 공포.

죽음으로 가는 이 발걸음은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에 오면 더 빨라진다.(실제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앞의 두 작품에 대한 메타 역할을 한다. 트레이싱 페이퍼와 인쇄된 단어만으로 구성된, 한층 추상적인 외양. 작가의 말처럼, ‘벛꽃이 흩날리듯이’(흩날리는 벛꽃은 사실 또 하나의 죽음의 이미지이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트레이싱 페이퍼들. 작가가 불특정다수의 인물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존재의 부고장이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애도의 행위이기도 하다. 삶을 획득하기 위해 오히려 우리는 진정한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음을 삶과 분리함으로써, 죽음을 확인하고 애도를 표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시체들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감각의 고집은 부고장의 선명한 글자 너머로 여전히 되풀이된다. 조선령/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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