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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 대하여

회화에 대한 많은 논의들 속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주제는 단연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것이다.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의 주요한 이슈들이 이 재현이라는 단어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회화적 기술로부터 비롯된 재현의 문제는 미술 자체의 존재이유를 공급한다. 반대로 말하면, 미술은 회화적 본질로부터 출발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현대미술은 회화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떠났다가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다시 회화로 회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화적 재현은 미술에서 ‘태도’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회화로 인해 미술은 재현의 여러 층위들, 즉 일차적이고 사실적인 재현, 사물의 유령으로 간주되는 시각적 환영으로부터, 이차적 재현 즉 관념의 재현, 방법의 재현, 태도의 재현으로 나아간다. 다소 개념적인 이 예술적 과정은 15세기의 피렌체 출신 문장가이자 과학자, 예술가였던 알베르티(Alberti, 1404~1472)에 의해 사유의 철학적 실현과 동등한 것으로 승격된 바 있다. 그는 그것을 ‘살찐 미네르바(Pingui Minerva)’ 즉 이론적이 아닌 실천적이고 예술적인 노력을 통해 지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화가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De Pictura> 1435년, 제 1권)

 

회화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알리는 숱한 징후들을 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여전히 회화는 무어라고 규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제대로 구현해내기 어려운 미술이라는 사실이다. 회화 역시 다른 많은 기초관념들과 마찬가지로 대답이 아니라 질문으로서만 존재한다. 회화가 고급한 문화적 제도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집단적으로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개별적 대응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회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완결된 시각적 결과물 대신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기억과 경험들 속에서 이 회화가 재구성하는 새로운 사건들을 바라본다.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지 않거나 심지어 질문을 결여하고 있는 많은 미술품들의 경우, 우리는 결국 회화적 재현기술과 예술적 재현이 어디에서 구분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문제를 되짚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너무나 많은 회화들이 회화적 재현기술로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알베르티의 저서를 그 제목으로 하고 있다. ‘회화에 대하여’라는 말은 완결되지 않은 문장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테마에 대한 질문의 시작을 알리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것이 목적하는 것은 ‘회화’의 고급한 단계로서, 예술가와 비평가, 관객이 모두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베르티는 이것을 위해서 예술가에게 의견을 아끼지 않고 독려하는 것이 모두에게 영예로운 일이라는 말로 자신의 글을 맺고 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의 회화에 있어 이러한 가치가 어떻게 발견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여기 세 명의 화가들이 있다. 이광호, 노충현, 문성식이 그들이다. 이 세 명의 작가들은 서로 다른 세계의 양상들을 자신들의 화폭 속에서 ‘재현’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세 명의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세 명의 작가들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 전통적인 회화의 기술을 가장 장인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고전적인 회화적 기법을 그대로 복기(復棋)해 온 이광호와, 유화 붓의 갈필기법으로 이루어진 사실적 표현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 온 노충현, 그리고 전기 르네상스의 세필화와 원근법을 연상시키는 문성식의 작품들은 모두 이들의 회화를 다소 ‘고지식한’ 스타일로 간주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주의적 화풍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회화적 기술’이 만들어내는 이차적 함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이유로서, 이 세 명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연작들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의 몸체를 통해 각각의 작품들에 매우 깊이 있는 개념적 서사를 부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유화적 시도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개별 작품들이 낱개의 비주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직 젊은 작가들이지만 이들이 형성하고 있는 예술적 어휘의 목록들은 매우 느리지만 단단한 패턴을 직조해내고 있다. 개별적 미술의 역사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가능성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충현은 매우 독특한 스타일로 주로 삭막한 도시 주변의 풍경들을 연작으로 그려냄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 미술계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뻣뻣한 유화 붓의 갈필과 테레핀이 많이 섞인 엷고 가라앉은 채도의 터치들로 이루어진 그의 화면은 인적이 없는 텅 비고 낯선 공간들과 더불어 드라마틱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마도 그림이 빚어내는 이러한 감정은 화가 자신이 이전에 무대미술을 직업으로 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묻어있는 문학적 색채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노충현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직접 글을 쓰는 작가일 뿐 아니라 작품의 제목에도 매우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 개념적 특질과 회화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관념적 서사에 가장 적합한 회화적 기술을 개발하여 채택하고 있다. 노충현의 회화가 중요한 이유는 서사와 회화성의 조율에 있어 회화가 본질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루크 투이만스(Luc Tuymans)의 작품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역시 회화적 본질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서만 두 작가의 기술적 측면을 비교할 수 있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느냐에 따라 동원되는 회화적 기술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투이만스의 절제된 묘사가 회화적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반면 노충현의 그것은 회화에 더욱 강렬한 드라마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노충현의 그림들 속에서 회화의 기술적 측면과 디테일의 밀도는 작가가 구현하려고 하는 관념의 재현을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적인 요소다.

한강 시민공원의 수영장, 터널, 컨테이너 박스, 테니스 장 등을 그리던 ‘살-풍경’에서 도시의 동물원을 그리기 시작한 ‘자리’ 연작에 이르기까지 노충현이 그리는 풍경들은 일관되게 무대의 정면성을 떠올리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때로는 극장의 2층에서 바라본 것 같은 뒤가 들린 듯한 왜곡된 원근법이 의도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붙인 제목인 ‘자리’ 역시 마치 무대 위에 설정된 가상의 공간과도 같은 현실의 실존적 상황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공간이 “그 어느 곳도 아닌 불확실한 장소이면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불모의 세계”라고 직접 밝힐 뿐 아니라 직접 이 단어를 소리 내어 읽어보도록 주문한다. 그만큼 회화적 공간은 작가나 관객 모두 몰입할 수 있는 장소이자 이입을 일으키는 장치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노충현은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제까지 회화적 공간을 지배해면서 다소 낡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전체적인 색채를 제거하는 것이다. 아니, 색채의 제거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치 인공적인 조명을 가한 것처럼 차가운 흰 빛의 레이어가 뒤덮인 화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전시에서 노충현은 부재와 가상의 인위적 조명과 무대와도 같은 원근효과, 그리고 이 장소에 실존적 깊이를 더해주는 회화적 단순성 등을 통해 현대의 도시적 삶을 예기치 못한 형식으로 축약하고 있다. 헤테로피아로서의 무대,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공간인 ‘동물원’은 회화가 그것의 서사성을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보여주는 비범한 사례인 것이다.

유진상 /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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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gh 그림 표현 기법이 참 마음에 듭니다. 2010.10.05 1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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