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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킴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교복 입은 소녀들을 그린 연작들이 실린 사간갤러리의 전시도록에서였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과거의 사진첩과 같은 다큐멘터리적 출처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정형화된 타입(type)으로 제시되면서 그래픽과도 가까운 형식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껍데기만 남기고 내용은 떠난 듯한 부재의 느낌과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것과 같은 냉정한 거리감이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기와 움직임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점이 독특했다.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없애버린 듯한 부재와 차단의 효과가 역설적으로 특수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에서도 그 효과는 여전했다. 교복 입은 소녀들과 더불어 사용된 전통적인 십장생 문양들은 정교하게 구현된 회화 표면 위에서 영구히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청춘의 상징인 여고생의 싱싱한 육체와 활기는 역사기념관의 기록사진 속보다도 한층 더 멀리 있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박제된 시간 속에 가두어진 듯 했다. 육체적 흔적들이 기화된 듯 텅 빈 껍데기만이 남겨져 있고, 회화적 모티프들은 지시할 내용들이 지워진 얇은 표면의 기호와 표식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 기호들의 세계는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매끄럽고 흠 없는 회화적 완성도로 인해서 더욱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다분히 의도적인 이 소격효과 속에는 어떤 심리적 기저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 스스로 이러한 작업이'완벽한 이미지(perfect image)'를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용을 삭제하고 표면만이 남아있는 듯한 그 특정한 효과가 어떠한 점에서 써니 킴에게'완벽한 이미지'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써니 킴의 작업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따라오는 꼬리표는'재미교포1.5세'라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이주에 따른 갑작스런 단절과 변화, 그 안에서 형성된 태도는 써니 킴의 작업을 이루는 중요한 근간이 되어왔다. 사간갤러리의 개인전에서 보여진 교복을 입은 소녀들 시리즈는 얼핏 그의 관심이 교포로서 바라본 한국사회의 제도적인 억압과도 같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교복이라는 소재가 내포하는 명백하게 제도적인 클리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민미술관에의 개인전에서 전시된 전통 자수문양을 주제로 한 작업들은 작가의 시선이 개인을 억압하는 특정한 제도적 틀과도 같은 정치사회적인 차원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 속에서의 일정한'규율(rule)'이라는 개념 자체에 보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규율'이라는 것은 억압적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어떠한 대상을 통제하여 특정한 형태로 조직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식적인 창조행위와 관련되기도 한다. 써니 킴의 작업에서 이러한 규율은 그림 속 이미지들을 스스로 조작하여 그가 지향하는'완벽한 이미지'에 이르게 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이'완벽한 이미지'에 대한 지향은 써니 킴의 작업을 추진시키는 중요한 동기이다. 교복 자율화가 되기 이전 한국을 떠난 그에게 있어 교복을 입은 여고생의 모습은 언제나 이런'완벽한 이미지'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교복이 주는 단정함, 규율 속에서의 통제된 아름다움, 그리고 교복이 그것을 입은 대상에 정확하고도 합당하게 부여해주는 사회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규율이 상실된 환경, 스스로 균형을 찾아내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교복은 써니 킴에게 안전한 질서가 보장된 청소년기에 대한 효과적 표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써니 킴의 작업에 나타나는 교복은 여학생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라, 확고하고 명백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복과 자수문양은 써니 킴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것, 그렇기 때문에 영구히 가질 수 없는 기억들을 재현하는 소재가 되어왔다. 이처럼 누락된 것들, 텅 빈 진공 상태로 남아있던 것들을 복귀시키려는 써니 킴의 작업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에 대한 부조리한 향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의 작업은 잡힐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전제로 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회화 속 이미지도 결국 완전한 현실이 될 수 없는 대체물이자 가짜(fake) 시공간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공의 세계이지만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균형을 위하여 끊임없이 요청되는 리얼리티와 관련되며, 내적 세계와 어디에선가 연결되고 접속되고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현실의 삶 속에서 온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지언정 써니 킴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심리적 보상기능을 담보하면서, 회화평면 안에서 만큼은 완전한 리얼리티를 얻는다. 써니 킴이'완벽함(perfection)'이 아니라'완벽한 이미지(perfect image)'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써니 킴의 회화는 상실된 세계의 파편들을 그가 작가로서 통제할 수 있는 회화평면의 형식적 규율 속에서 그야말로'완벽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관념의 세계이자 순수한 회화적 유토피아이다. 최근 작업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무중력한 공간감, 공기나 유령처럼 실체감이 없는 특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현된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 써니 킴의 작업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갤러리현대16번지의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교복 입은 여학생 연작에서 발전된 것들이지만, 개인의 사진첩이 아니라 영화나 잡지, 신문과 같은 객관적 출처를 주로 활용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작업 속에 움직임의 요소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작업에서 교복 입은 여학생이나 자수문양이 영구히 정지된 부동의 포즈를 취한 채 박제된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면, 영화나 잡지에서 인용한 최근작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떠한 시공간 속에서 조심스럽게 살아 있는 듯하다. 그 움직임은 여전히 매우 미약하여 인물들이 서 있는 듯 움직이는 듯 모호하지만, 기념관 자료와도 같이 평면적으로 구성되었던 과거의 작업들 보다 공간적인 리얼리티를 얻고 있음은 분명하다. 써니 킴이 차용한 이미지들 속에는 여전히 교복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본래 출처 속의 내러티브와는 무관하게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시공간을 위한 회화 속 배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있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호하며,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는 명확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얼굴은 그려지지 않고 주로 뒷모습이나 일부가 잘려진 작업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업 중인 이 새로운 연작들을 처음 보았을 때 영화'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가 떠올랐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주인공들이 죽음 후의 공간으로 이동하기 전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로 구성된 이 영화 속에는 주인공들이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환영과도 같은 느낌이 줄곧 있었는데, 이처럼 모호한 중간지대와 같은 분위기가 써니 킴의 작업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Sunset」과 같은 작업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은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지 슬퍼 보이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며, 그들 앞에 놓인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마치 스크린 위에 투사된 영상처럼 불이 꺼지면 곧바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희뿌옇게 처리된 레이어 효과들로 인해서 회화 속 공간 전체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이들의 존재는 정령처럼 가벼워 보인다. 「Drive」나 「Balloon」 같은 작품은 보도사진의 일부를 변형시킨 것이다. 「Drive」에서 라이트를 켜고 희미한 빛 속을 가로지르는 군용트럭들의 행렬은 어디를 가는지 모른 채 떠나야 하는 갑작스럽고 비밀스러운 이주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Balloon」에서의 낙하산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시간이 정지된 공간 속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Spring」에서 적막한 산 속에서 갑자기 출현한 듯 어딘지 어색한 건물의 모습에서는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정체불명의 것들에 대한 심리적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실상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한번은 본 것 같기도 한, 아주 오랜 기억들을 떠올릴 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써니 킴이 만들어낸 가상의 기억들이 보는 이에게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이입 효과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입 효과는 써니 킴의 최근작에서 새롭게 성취된 특질이다. 지난 작업들에 의도적인 차단의 효과가 강했다면, 최근작들에서는 심리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소통의 창문이 슬쩍 열려 있는 듯하다.
 
써니 킴은 인터뷰 중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 영화 속 장면에서 발췌한 이미지들 모두가 일종의 자화상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치 연출자와도 같이 여러 출처들의 인물과 풍경을 가져와서 출처 본래의 맥락을 삭제하고, 자신만의 회화 속 시공간의 주인공과 배경으로 변형시킨다. 여러 출처들을 편집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컴필레이션 방식은 다문화적 병치를 즐기는 그의 평소 성향과도 잘 통한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상이한 문화적 틀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해나가면서 형성되었을 이러한 태도는 현재까지 써니 킴의 중요한 작업 방식이 되고 있다. 이 출처들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어떠한 그만의'완벽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문화적 출처들 사이를 배회하면서, 써니 킴은 그가 잃어버렸지만 복구하고 싶은 심리적 공간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구조 속에서 어딘가 끊어진 차원의 것들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완결이 불가능한 시도일지라도 모종의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 써니 킴의 작업에서 어딘지 본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누구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떤 것들에 대한 버릴 수 없는 향수를 가진 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잃어버린 그 세계는 현실에 침윤되지 않은 채 피안의 세계로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끝없는 환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써니 킴은 최근 초상화 시리즈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미 청소년기를 지나 버린 여성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작업이다. 그는 이 여성들을 마치 성인(saint)들의 초상과도 같이 이상화된 자세로 그리고자 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았던 교복 입은 청소년기에 대한 이상화이자 이미 사라진 시절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초상화 시리즈는 사진이나 영화장면 같은 간접적 출처를 사용하지 않고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한 첫 시도이다. 인물들에게 교복을 입히고 특정한 포즈를 취하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연출자적 태도를 견지하며,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들의 맥락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분명히 전 작업들과 다른 현실감의 표현이라는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이 초상화 연작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억과 현실을 접합시켜나가면서 또 다른'자화상'으로 발전되어갈지, 이후의 전시를 기대하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자 한다.

이은주 / 독립 큐레이터,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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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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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zns 교복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지만 내용처럼 뭔가 기묘하고 음산한 느낌이 납니다. 2010.09.28 17:53:51
ArtKim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부모님에게도 나와 똑같이 청소년기의 서툰 열정과 불현듯 떠오를 추억이 있겠지요 2010.09.18 22: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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